이곳에서 예술을 찾지 마세요. 여러분이 보고 느낀 것이 전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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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눈을 가진 아이에게 초대장을 받았어요. 초대장에는 ‘이곳에 예술은 없다(No Art Here)'라고 쓰여 있습니다. 도발적인 문구가 신기하기도, 궁금하기도 하고 이 아이가 워낙 유명한 친구이기도 해서 단걸음에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처음 본 광경. Are you ready? 어쩐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11일(목), 공식 오픈을 앞두고 예술의전당에서 하비에르 카예하 특별전 《이곳에 예술은 없다(NO ART HERE)》 프리뷰 행사가 열렸습니다. 하비에르 카예하의 대표작 「No Art Here(2019)」와 동명인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10여 점을 포함해 회화, 드로잉, 조각 등 총 12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준비됐냐는 물음을 던지는 폼이 평범하지 않았는데 전시 첫 섹션은 더 비범합니다. ‘이곳에 예술은 없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일까? 커다란 공간은 텅,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벽에 액자가 걸려있지만 자세히 보면 빈 캔버스예요. 어쩐지 장난에 걸려든 것 같지만 동시에 궁금증과 기대감도 솟습니다.
익숙한 그림체의 소년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전시 포스터에 있던 그 소년이에요. 삐뚤빼뚤하게 ‘엉망진창’이라 쓰인 팻말을 들고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꽤 격한 인사예요. 말로만 듣던 소년은 정말 눈이 컸고 각막은 마치 고양이의 그것처럼 동그랗게 투명했습니다. 어렸을 적 구슬치기 할 때 가지고 놀았던 유리구슬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습니다. 기꺼이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우리가 반갑다는 듯한 얼굴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 아이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NO ART HERE
전시를 보기에 앞서 하비에르 카예하는 “나의 작품엔 무언가 있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객의 몫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관객의 감상을 제한할 요소를 제거한 거예요. 그렇기에 이 전시엔 답이 없습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전부일뿐, 답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거예요. 특별전을 보는 모든 관람객은 오로지 자신의 감상에 집중하면 됩니다.
하비에르 카예하가 탄생시킨 아이들의 공통점은 맑고 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흠집도, 먼지 한 톨도 없어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제각각입니다. 장난기 가득하기도, 텅 비어있기도, 놀라워하기도 해요.
투명한 눈만큼이나 감정 표현도 투명하고 확실합니다.
'A little Laziness a day keeps craziness away'
'Sorry! too lazy today! I will finish tomorrow!'
'Have a nice lazy day'
‘좋은 느낌!’
하루의 게으름이 광기를 막는다, 오늘 너무 늘어지니깐 내일 끝내겠다고 선언하는 아이의 표정은 딴청을 피우는 것 같기도, 당당한 것 같기도 해요. 어찌 됐든 동의하는 바입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지만 약간의 게으름은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구멍이고, 스스로에게 작은 구멍 정도는 허락해도 괜찮으니까요. 아이 덕분에 숨을 한번 돌려봅니다.
익살스럽고 개구진 아이들만이 존재할 것 같지만 섬뜩함을 자아내는 순간도 있습니다. 특정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처럼 아이들의 깨끗한 눈이 갑자기 기묘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시각적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있습니다. 작가가 처음 만든 「푸른 하늘이 그리워」라는 작품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 눈을 연상케 하고 텅 빈 머릿속에서 피어난 꽃은 기괴한 아름다움을 연출해요.
이처럼 아이들은 어렵고 또 다채롭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아니고 아이와 고양이
커다란 검은 고양이(이 고양이 이름은 Mr. GÜNTER), 키를 훌쩍 넘는 책상과 의자, 한계 없이 커지는 탄성 좋은 풍선껌. 만화나 애니메이션, 동화는 상상으로만 그쳤던 내 머릿속 그림을 대신 실현시켜주죠. 덕분에 우리는 스크린과 책을 통해 나보다 큰 고양이와 터지지 않는 풍선껌을 볼 수 있어요.
초대된 이 공간도 그렇습니다. 분명 작은 몸으로 전시장 구석구석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검은 고양이는 거대 마법에 걸린 듯 커져 있습니다. 책상과 의자도 몰라보게 거대해졌고 연필을 들려면 온 몸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마치 거인족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에요. 이 전시는 한발 더 나아가 스크린과 책 속에 존재했던 것들을 실체로 선보입니다. 어쩐지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죠?
캔버스를 넘어
하비에르 카예하 전시에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전시장 벽을 그저 벽으로만 두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벽을 코르크 판처럼 활용하거나 작품이 벽을 튀어나가도 개의치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벽에 낙서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소년이 혹은 검은 고양이가 낙서를 한 것처럼 벽에는 그림과 글씨가 가득해요.
벽을 보면 기존 예술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어요. 그 덕에 아이의 곱슬머리는 커다란 뭉게구름이 되고 이곳을 찾아온 모두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겠다는 소년의 마음을 알게 돼요. 규정을 넘는 첫 발이 어려울 뿐이지 한번 넘는 순간 작품의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포인트가 된다는 것을 작품이 말해주고 있어요.
자유로운 공간 사용 때문인지 생 바나나를 전시한 작가로 유명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떠올랐는데요. 작년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WE》 전시만 봐도 미술관 공간 자체가 광활한 캔버스였어요. 심지어 바닥을 뚫기도 했으니까요. 카예하의 전시 역시 공간이 작품의 한 부분이 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바나나는 거들 뿐 전시 《마우리치오 카텔란 : WE》] (보러 가기)
그러다 벽에 걸린 까만 머리 소년을 발견했어요. 카텔란 본인이 벽에 걸린 「무제」가 생각나는 소년이었는데 알고 보니 카예하의 헌사 작품이었습니다. 형태는 카예하의 작품인데 자아내는 분위기는 카텔란의 그것입니다.
전시 첫 파트
전시 마지막 파트
느껴지시나요? 이곳에 예술이 없다며 텅텅 빈 공간이었던 첫 번째 파트와는 달린 마지막 파트는 작가의 작품을 집약해놓은 것처럼 꽉꽉 채워져있습니다. 이곳에 예술이 없다고 말한 것은 물리적으로 예술 작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였음을 한 번 더 강조하는 듯해서 재미있는 변화였어요.
이렇게 카예하는 마지막까지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말을 걸며 출구를 안내합니다.
이 작품을 보러 가기 전, 빨간 모자를 쓴 소년을 보며 귀여운 작품이 가득 담긴 동화 같은 전시가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했습니다. 물론 틀린 감상은 아닐 거예요.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작가가 말했으니까요.
저에게는 아이라는 주체에 담긴 스테레오타입을 조금은 깨부수는 전시였습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한정적이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았어요. 그랬기에 때론 순수하고, 때론 세상에 이치를 통달한 것 같았으며, 때론 섬뜩하게 느껴졌겠죠.
계속 말했듯이 이 전시에 답은 없습니다. 자신만의 감상으로 빈 공간을 채워보세요. 맑고 큰 눈의 아이가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나요?
하비에르 카예하 특별전 《이곳에 예술은 없다(NO ART HERE)》
· 전시 기간: 24.07.12.(금)~10.27.(일)
· 관람 시간: 10:00~19:00 (매주 월 휴관)
· 장소: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3, 4전시실
· 가격
- 성인(만 19세~64세) 20,000원
- 청소년(만 13세~18세) 15,000원
- 어린이(만 3세~12세) 12,000원
*상세 할인은 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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