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착시를 겪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습니다. 멀리서 작품을 봤을 땐 다양한 색상의 혼합인 줄만 알았지, 내 눈이 '색이 섞여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몰랐거든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크루즈 디에즈-RGB, 세기의 컬러들》 전시를 보고 있으면,
1)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2) 변화를 감지하고 내 눈을 의심한다.
3) 작가의 의도를 알아채고 감탄한다.
내내 이 패턴을 반복합니다. 그만큼 크루즈 디에즈는 색과 색 인지에 대한 높은 이해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작가가 완성한 이 공간에 과감히 빠져보세요. 익숙하게 느껴졌던 색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크루즈 디에즈-RGB, 세기의 컬러들》
색 포화(Chromosaturation)
빛의 삼원색 RGB
모든 빛을 반사하는 흰색 공간에 빛의 삼원색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 조명만이 불을 밝힙니다. 가장 먼저 빨간 조명이 직사하는 Red 존으로 들어갔어요. 어쩐지 적외선 치료를 받는 듯한 오묘한 기분으로 빨간 벽을 응시하는데 처음과는 달리 빨간색이 점점 희미하게 느껴져요. 마치 분홍색 같아요. 이상함을 감지할 때쯤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도슨트 안내에 따라 Blue 존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엔 사방이 강화유리로 된 해저 호텔 같은 조명 아래에 얼마간 머무른 뒤 다시 Red 존으로 들어가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도에 변화를 주지 않았음에도 빨간색이 다시 짙어졌거든요.
원색 빛의 자극에 계속 노출되면 우리 눈은 시각적 피로를 느껴요. 이때 신비롭게도 눈은 안정을 찾기 위해 흰색을 찾아가는 시각의 안정화 과정을 작동시켜요. Red 존에서 점점 빨간색이 옅어지고 분홍색처럼 보였던 것도 눈이 스스로 피로를 풀기 위해 안정화 시스템을 돌린 거예요.
신기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색 포화' 공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빨강, 녹색, 파랑, 세 개의 색상만을 볼 수 있었는데 어느새 바닥에도, 천장에 달린 조형물에도 R, G, B가 혼합된 색상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24피스 파스텔을 보는 것 같죠? R, G, B에서 시작됐지만 눈에 남은 잔상은 노랑, 보라, 분홍 등 색 스펙트럼을 만들어 아름답게 일렁였습니다.
놀라운 건 흰 벽도 조명도 그대로, 바뀐 건 오로지 색을 받아들이는 우리 눈뿐이었어요. 이처럼 벽과 조명만으로 다양한 색을 경험케 하는 크루즈 디에즈의 의도는 첫 파트부터 명확하게 드러나요. 무엇보다 이 변화를 경험하고 인지하는 관객, 그리고 관객과 작품의 상호작용 역시 이 전시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평면 작품(Bidimensional Artworks)
크루즈 디에즈의 평면 작품 12점을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공간은 분명 평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색이 입체적으로 파동 하는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작가가 사용한 색은 빨간색, 녹색,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뿐. 하지만 눈에서 펼쳐지는 건 리듬처럼 흐르는 다양한 색상들입니다. 이 파트는 평면에서 방출된 색이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 집중하기 때문에 앞, 뒤, 양옆으로 움직이며 작품을 감상하면 좋아요.
「색 추가 RGB 8번」
자, 어떤 색이 보이세요?
저는 연한 초록, 연한 빨강, 연한 주황, 보라색, 파란색 등이 보여요. 꼭 여러 색이 섞인 물감통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포토샵에서 그러데이션 효과를 준 것 같기도 하고요.
「색 추가 RGB 8번」
하지만 아주 가까이서 보면 이 작품이 빨간색, 녹색, 파란색, 검은색으로만 구성됐다는 것을 알게 돼요.
크루즈 디에즈는 굳이 색 안료를 섞지 않았습니다. 세로로만 선을 배열했을 뿐이고 우리 눈이 자연스럽게 빨간색과 녹색이 맞닿는 지점에서 노란색을 인식했습니다. 이렇듯 존재하지 않았던 색은 우리 눈에 들어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되는데, 크루즈 디에즈는 이를 '색채 현상 모듈(Chromatic Event Modules)'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어려운 명명이지만 우리 눈이 자연적으로 색이 섞여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타난 상태인 거예요.
「노란색 유도 한국」
「노란색 유도 한국」
「노란색 유도 한국」 은 보색 잔상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멀리서 봤을 때 작품 중앙에 노란색 사각형이 보이지만 작품에 가까워질수록 사용된 색료는 검은색, 흰색, 파란색(노란색의 보색)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색 잔상은 보통 특정 색상을 일정 시간 바라본 뒤 다른 곳을 보았을 때 그 색상의 보색이 눈에 남아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크루즈 디에즈는 이 단계를 압축해 한 화면에서 하나의 색과 보색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설계했고 그 작품이 바로 「노란색 유도 한국」 이에요.
크루즈 디에즈가 선보이는 이 작품들은 옵 아트(Optical Art, 기하학적 형태, 미묘한 색채 관계, 원근법 등을 이용해 눈에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추상미술의 한 형태)에 기반하지만 과학 원리, 인지 심리, 여기에 작가의 철저한 탐구와 계산이 동반됩니다. 이 순간 예술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가까이에서 보면 색 구분이 명확하지만 멀어질수록 그러데이션처럼 경계가 흐려진다.
'평면 작품' 공간에서 바라본 '색 포화' 조명의 다양한 색들
크루즈 디에즈는 모든 작품을 철저한 계획 아래 프로그래밍합니다. 앞서 말했 듯 작가가 사용한 색은 R, G, B, 그리고 검은색뿐이고 이를 정교하게 배치했을 뿐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인식되는 색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다양해진 것이며 작가는 이를 100% 활용해 예술로 승화시켰어요. 그 설계와 예술이 12점의 평면 작품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색 간섭 환경(Environnement Chromointerferent)
'색 포화' 공간에서 컬러 샤워를 했다면 '색 간섭 환경'에선 착시 샤워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면에 모두 빛이 움직이는 영상을 쏘기 때문에 착시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일정한 간격을 둔 수직선의 빛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우리 눈에는 여러 형태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여요. 심지어 빛은 직선인데도 불구하고 곡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마치 '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루후으' 문자열처럼요.) 때문에 그 잔상이 어지럽게 느껴지고 어지럼증을 느낀다면 바로 그 공간을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이러한 변화 때문에 가만히 멈춰 있는 공이 꼭 제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도슨트를 듣더라도 전시장을 나가기 전 다시 방문해 시간을 충분히 두고 빛의 흐름을 느껴보길 추천하는 파트입니다. 단, 어지럼증이 없다면 말이죠.
색채 경험 프로그램
전시 MD
크루즈 디에즈의 생각을 이해하고 색채 메커니즘을 경험할 수 있는 색채 경험 프로그램까지 완료하면 전시는 끝이 납니다. (신기하고 재미있으니 꼭 시도해 보세요.)
《크루즈 디에즈-RGB, 세기의 컬러들》
평소 색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어요. 색을 입고 있는 모든 사물들, 사람들은 너무 익숙하고 당연시 여겨지는 모습이니까요. 그래서 크루즈 디에즈가 보여준 색의 착시, 색이 혼합되어 우리에게 도달하는 과정이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관람객이 직접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만든 전시 경험이 있었기에 극적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요. 그는 어쩌면 예술가를 넘어 과학자이자 철학자가 아닐까 싶네요.
도슨트를 통해 어렵고 난해하게 다가왔던 크루즈 디에즈의 작품들에 몰입하고 충분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도슨트나 오디오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빛의 삼원색을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내 감각에 온전히 집중해 전시를 즐겨 보세요.
《크루즈 디에즈-RGB, 세기의 컬러들》
· 전시 기간: 24.06.01.(토)~09.18.(수) / 매주 월 휴관
· 관람 시간: 10:00~19:00 (입장마감 18:30)
· 전시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 관람 요금
- 성인 13,000원
- 청소년 및 어린이 10,000원
-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의상자, 국가유공자/의상자 유족 8,000원
- 36개월 미만 무료
*관련 증빙서류 필참
*20인 이상 단체가 적용
홈페이지(바로 가기)
사용 제품|리코 GR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