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의 작은 브릭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브릭이 쌓이고 모이면 거대한 왕국을 이루기도, 귀여운 캐릭터가 되기도 하며 어쩔 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해요.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것이죠.
조용하고 평화로운 문화비축기지 한 귀퉁이에 이 작은 브릭들의 세계가 만들어졌어요. 바로 어른들에겐 동심 회복의 기회를,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의 세계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어르신들에게는 지난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주제들로 완성된 여름방학 특별전 《8인 8색 브릭아트》입니다.
국지성 호우가 기승이던 어느 날, 문화비축기지를 방문했습니다. 《8인 8색 브릭아트》는 T5, T6에서 전시 중인데요. T5에선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일상과 재난과 행복의 메시지를 담은 브릭 아트를, T6에선 친근한 캐릭터와 동화 속 세계와 우리에게 익숙한 건물들이 브릭 아트로 재탄생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T5
요즘 다시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19는 수십 년 간 다져온 일상을 단 몇 년 만에 바꿔놓았죠.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공포, 불안, 걱정 등 불편한 감정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고요. 이관호 작가는 죽음, 공포를 상징하는 해골과 브릭을 결합해 코로나19로 느꼈던 감정, 단편적 경험들을 표현했습니다.
형형색색 브릭으로 만들어진 해골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해골이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에 집중하게 됩니다. 웃고 울고 화내는 해골의 표정엔 작가가 혹은 우리가 싸워왔던 시간들이 녹아 있습니다. 너무 강렬해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이요. 다만 화려한 색감과 일부 아기자기한 연출 영향인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그 시간의 감정이 거세게 다가오진 않았어요.
해골 작품 대부분 돌기가 오른 부분이나 움푹 팬 면이 아닌 브릭 옆면으로 완성돼 멀리서 보면 픽셀아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뚜렷하게 보이는 요철이 해골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어 전시된 윤민욱 작가의 작품은 레트로 감성의 정수입니다. 특히 사소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들을 발견하는 순간 감탄하게 됩니다. 작가의 섬세함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브릭의 유연성이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이 파트에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보이세요? 의자의 나무판자도, 서랍 속 책도, 책상 위 연필과 지우개, 원색 가방도 모두 브릭입니다. 그럼에도 옛날 학교에서 사용됐던 오래된 책상과 의자의 느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간직한 향수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나무 의자 겉면에 금이 가 붙인 청색 테이프 디테일마저 '진짜 레트로'입니다. 분명 4D가 아닌데 학교 안 교실, 그중에서도 오래된 나무 바닥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매끈한 브릭으로 바랜 기억 속 레트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이날 가장 놀라웠고 작가의 손끝에선 무엇이든 탄생되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레트로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번에 느낀 감정은 정겨움이에요. 체육관, 정육점, 이용원 등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곳은 동네 한 길목을 떠오르게 합니다. 전깃줄, 색이 벗겨진 지붕과 간판, 옥상에 널브러진 잡동사니, 줄에 걸린 빨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풍경이에요.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냄비는 또 어떻고요. 이곳은 추억의 총 집합체. 그 어느 곳보다도 그 시대를 살아간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었어요.
T6
계단을 오를수록 신데렐라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성의 최상단 부분이 빼꼼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지막 계단에 서자 만화 혹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판타지 가득한 장소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실 롯데월드가 떠올랐어요. 무엇이든 꿈과 희망의 나라인 건 확실합니다. 작아지는 마법에 걸려 그 안을 뛰어다니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요.
T6에 전시된 작품들은 수 백, 수 천 개의 블록이 결합돼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이 파트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는 건 웅장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디테일 하나하나를 보고 있으면 전체 그림이 다시 보고 싶고, 전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디테일이 또 궁금해집니다. 덕분에 이동 트럭에 있는 레고, 관람차를 타는 레고를 발견할 수 있었고 테마파크에 온 기분도 들었고요.
「놀이공원」이 재미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테마파크의 활기와 들뜨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브릭 아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테마파크에서 퍼레이드를 보고 놀이 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나의, 사람들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돼요.
근처에 브릭을 파는 곳이 있었다면 당장 들어가서 구매를 했을 법한 충동이 강하게 일었는데 MD를 파는 전시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작품의 포인트는 바로 바다 아래를 표현한 것입니다. 측면으로 가야 비로소 보이는 이 공간은 관람객이 단면만 보지 않고 시야를 확장하게끔 만듭니다. 피라미드와 수많은 병사, 스핑크스에 밀려 푸른색 바다는 한 귀퉁이에서 미미한 존재감만을 드러낼 뿐이었는데요. 이 바닷속을 발견한 순간 보물찾기 종이를 발견한 기분도 들어요. 또 이집트의 사막을 표현하기 위해 채도가 낮은 브릭을 사용한 지상과는 달리 초록색을 필두로 다양한 색이 어우러지고 푸른 조명이 빛나는 바다는 또 다른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외에도 브릭으로 탄생한 <라이온 킹> 주인공들과 슈퍼 마리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서울역, 우리 땅 독도도 볼 수 있어요. 무엇보다 독도도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바다 아래 공간이 있으며 더욱 확장된 바닷속 공간이 펼쳐져 있으니 측면도 놓치지 마시길.
이처럼 정교하게 결합된 브릭은 팝콘이 되기도, 고양이가 되기도, 해골이 되기도, 고대 유적이 되기도, 언제나 지켜야 할 공간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동심도, 향수도, 즐거움도 줄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저는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꼈는데 동시간대에 관람했던 어린이 친구는 신기해하기도, 낯설어 하기도 해서 같은 것을 보는 데도 수용하는 차이를 실시간으로 목격해서 더 즐거웠어요. 어린이 친구에게 훗날 이 기억은 향수가 될지 즐거움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8인 8색 브릭아트》
· 일정: 24.07.06.(토)~09.01.(일)
· 장소: 문화비축기지 T5, T6(서울시 마포구 증산로 87)
· 관람 요금: 무료
사용 제품|리코 GR3, GR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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