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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매거진

랜덤 다이버시티
LIFEArt & Culture
《랜덤 다이버시티: 더 레터》 후기:
오열하는 F 참가자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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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는 아니고요. 전시를 보고 온 친구가 '편지 쓰고 오열하는 MBTI F 참가자가 되...'(오타 아니고 밈입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거든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느긋하게 나를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아요. 하루하루를 쳐내기에도 버거운 시간이죠. 그 안에서 《랜덤 다이버시티》 작가는 AI, 뇌파를 이용해 지난 몇 년 간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 우리에게 '나'를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감정 백신을 제작하고, 특정 기억을 연상시키는 향기를 찾고, 나의 감정을 색으로 기록하는 등 과학이라는 가장 객관적인 툴로 감정이라는 가장 주관적인 부분을 주시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가는 시간 속에 머물렀습니다.

 

저도 지난해 《랜덤 다이버시티: 더 무비》에서 감정 백신을 제작했었어요. 애정하는 대상의 사진을 본 저의 감정이 뇌파로 전달됐고 그렇게 추출된 감정의 색은 맑은 보라색이었어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감정 백신을 볼 때마다 대상을 향한 저의 감정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나의 감정은 OO색? 체험형 전시 <랜덤 다이버시티: 더 무비>

 

 

ⓒ노들섬 홈페이지

 

 

그리고 올해 《랜덤 다이버시티》는 '더 레터'라는 부제를 달고 찾아왔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벤트를 가진 채로요. 또 'AI 시대의 외로움, 잃어버리는 나 그리고 너'라는 전시 주제처럼 AI를 활용한 체험이 많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욱 아날로그가 돋보이는 전시이기도 했습니다.

 

《랜덤 다이버시티 2024: 더 레터》는 크게 세 파트로 구분되어 있고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평일 오후,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지만 이미 라운지 안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랜덤 다이버시티의 시그니처, 감정 백신의 인기(?)를 실감하는 동시에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크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Part.1

감정 백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80여 개의 감정 백신이 진열된 철제 선반입니다. 감정 백신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총천연색 감정이 담겨 있어요. 투명한 유리병을 물들인 색상과 라벨링에 적힌 단어를 보고 마음에 드는 백신을 골랐다면 뒤쪽에 마련된 ‘이모션 백신 라이브러리(Emotion Vaccine Library)’로 이동합니다. 스캐너에 바코드를 인식시키면 백신 주인의 감정과 기억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모션 백신 라이브러리

 

 

마음에 꽂힌 단어가 라벨링 된 백신 2개를 골랐습니다. 우주의 마음, 콘크리트 정글.
초록색이 주는 청량함, 파란색이 주는 맑음과 달리 추출된 감정은 어딘가 탁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리움과 후회로 점철되기도 했고요. ‘우주의 마음’은 제가 예상했던 감정과는 정반대의 서술이었지만 ‘콘크리트 정글’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가슴 한 편을 꽉 누르고 있는 답답함을 대변하는 듯했고 흔한 위로도, 해결책도 없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집중의 삼각지대

 

 

중앙에는 성인 ADHD 진단 과정에서 모티프를 얻은 테스트 '집중의 삼각지대'가 있습니다. 인지력, 순발력, 기억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으로, 작가는 이 테스트를 통해 우리가 왜 현실에 집중을 하지 못하며 무엇에 진정으로 집중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쉽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이 엉뚱한 곳을 터치할 수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화면과 주어진 질문에 집중하세요.

 

처음에는 이 테스트가 체험의 한 부분으로 등장한 것이 의아했는데요. 테스트를 위해 인지력, 순발력, 기억력을 발휘하고 그 결괏값을 받는 것도 나를 알아가는 한 과정이란 생각이 들자 서서히 납득이 갔습니다.

 

 

(왼) 너와 나의 메커니즘 / (오) 라쿠나 社의 거울

 

 

 

불투명한 파티션 안쪽에는 '라쿠나 社의 거울'과 '너와 나의 메커니즘' 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라쿠나 社의 거울은 '타인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진다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실험으로 AI 카메라 앞에 선 나의 모습이 블러 처리됩니다. 나는 존재하지만 화면 속(상대방의 기억 속) 내 모습은 흐릿해서 내가 나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어요. 대상을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꿈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요. '잊힌다'라는 행위를 가시적으로 잘 보여주는 파트입니다. 타인에게 잊힌다는 막연한 문장이 눈앞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불유쾌한 경험이었어요.

 

반대편에도 AI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다른 점은 이 객체 인식 AI가 화면 속 대상이 사람인지, 사물인지 판단해요. '너와 나의 메커니즘'은 매 전시마다 특성을 달리해 설치되고 있는데 이번엔 AI가 대상을 스스로 판단하여 명명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AI가 실시간으로 학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고 하더니 AI가 판단한 저는 영특한 호랑이네요.

 

 

메아리 합창단
Tear by bit : 눈물의 엔트로피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으면 내 목소리에 반응한 인형들이 함께 합창하고 춤을 추는 '메아리 합창단', 작가의 눈물에서 추출한 슬픔 데이터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작가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Tear by bit : 눈물의 엔트로피'도 볼 수 있습니다.

 

 

Part.2&3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받는 사람=보내는 사람'과 '익명 편지 교환소'입니다. 밝았던 파트 1과는 달리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의 이곳은 편지를 쓰는 공간이에요. 

 

 

 

익명 편지 교환소

 

 

레트로 느낌 가득한 컴퓨터로 익명의 편지를 남기는 익명 편지 교환소입니다. 나와 같은 시간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면 돼요. 작은 모니터 화면 때문인지 과거로 회귀한 기분으로 자판을 두드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특정 타인에게 전하는 말이지만 곧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고요.

 

출력된 종이를 끈으로 잘 묶어서 보관함에 넣으면 교환소에서 할 일은 끝인데요. 교환소인 만큼 타인이 쓴 편지를 꺼내 읽어봐도 돼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이렇게 우리는 작은 편지 속에 기꺼이 작은 마음 하나를 담아요. 꽤 뿌듯했습니다.

 

 

받는 사람=보내는 사람

 

 

익명 편지 교환소 양옆에는 To me, From me, 나에게 편지를 쓰는 공간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막막했습니다. 어떤 말을 써야 하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 하고 있는 걱정은 무엇이지? 책상 앞에 앉으니 저절로 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운을 떼기 시작하니 쏟아지듯 하고 싶은 말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활자로 정리되니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제 친구는 이곳에서 눈물이 났다고 해요. 그것이 후회의 눈물인지, 위안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는 스스로만이 알고 있겠죠. 이 공간이 특별한 건 오로지 나, 그리고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고 정리되지 못한 나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인지 이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꽤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와 마주하는 일은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참고로 편지를 쓸 때는 최대한 글씨를 또박또박 쓰고 내용도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 AI가 글씨체를 인식해 가장 비슷한 글씨체로 답장을 쓸 수 있거든요.

 

 

‘미래의 나’의 답장

 

 

다 쓴 편지를 들고 도슨트에게 가면 AI, 미래의 내가 쓴 답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 편지를 학습해 쓰는 답장이다 보니 '답이 정해져 있는' 내용이었고 사람에 따라 뻔한 답장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저 역시 편지를 받아보고 난 후 처음에는 내가 쓴 편지를 재조합한 답장에 불과하다 느꼈는데요. 저 스스로가 그런 답장을 바라고 쓰진 않았을지란 생각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AI의 답장은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듯했어요.
 

 

색 추출 실험

 

 

랜덤 다이버시티의 메인인 '색 추출 실험'도 AI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공간에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번 경험했기 때문에 올해 색 추출 실험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난해, 난생처음 경험했던 색 추출 실험의 신기함과 놀라움은 여전히 제 머릿속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요.

 

작년에도 꽤 개방된 곳에서 실험을 진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가림막도 투명 창인데다가 더욱 오픈되어 있는 곳에서 실험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AI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같은 공간에서 머무르다 보니 보는 눈들이 더 많아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색이 추출되는 장면을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점.

 

 

 

 

나를 알고 싶은 욕망은 발목에서 찰랑이는 바닷물 같습니다. 흘러넘치진 않지만 계속 신경 쓰이고 지나간 듯 보여도 다시 내 발목을 간지럽히는 것처럼요. 이전에는 그 욕망을 해갈하는 것이 감정 백신이었다면 이번에는 편지가 그 도구로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습니다. 편지 덕분에 바로 이전 프로젝트였던 《랜덤 다이버시티: 더 무비》보다 더 직관적이고 확실한 '나를 바라보는' 전시이기도 했고요.

 

또 이번 전시의 다른 이름은 'Look at Me 청년 마음 전시'입니다. 아모레퍼시픽공감재단은 2030 청년 세대가 가진 고민을 함께 공감하며 마음 건강 증진을 지원하고 이 전시를 통해 청년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돌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랜덤 다이버시티를 지원했는데요. 저 역시 청년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숏폼처럼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나도 흔들리고 있는지, 아니면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는지 느리게, 조용하게 내면을 주시하는 경험이 꽤 괜찮았다고 한 줄 남겨봅니다.

 

 

《랜덤 다이버시티 2024: 더 레터》

· 전시 기간: 24.08.01.(목)~09.29.(일) 13:00~21:00 / 매주 월 휴관
· 장소: 노들섬 노들라운지(서울시 용산구 양녕로 445)
· 입장료: 무료 (단, 색 추출 실험은 유료이며 사전 예약 필수)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색 추출 실험 예약 페이지 (바로가기)

 

 


 

사용 제품|리코 GR3, GR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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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M 글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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