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nn년. 회사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인 1인 저에게 '지하철' 하면 이제 출퇴근길 지옥철부터 떠오르지만 처음 상경했을 당시엔 매우 신기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단단한 땅속에 난 커다란 구멍을 나아가는, 지상이 아닌 지하로 달리는 기차라니. 만화영화에서만 봤던 땅속 광속 기차가 실존했던 것입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 29주년이 되던 해,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종로선이 개통됐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서울,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저처럼 땅속을 달리는 기차가 낯설었던 사람들에게 지하철은 익숙한 교통수단이 됐습니다. 1984년 11.4%였던 지하철 수송분담률이 1997년 30.8%까지 증가한 것만 봐도 지하철의 탄생이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지하철의 역사를 펼쳐 놓은 서울 지하철 개통 50주년 기념 전시 《서울의 지하철》은 누군가에겐 열차를 처음 탔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고 또 누군가에겐 그 시절을 새롭게 알 수 있는 커다란 아카이브였습니다.
땅속을 달리는 열차
지하철 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문서와 계획서 등
서울을 종횡무진 하는 커다랗고 기다란 기차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니죠. 서울에 지하철이 도입되기까지의 여정과 지하철이 움직이는 원리와 부품을 소개한 코너가 첫 번째 파트입니다. 지하철 공사를 착공하기 위한 관련 부서의 기안 문서부터 '서울도시기본계획',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화 사업 계획안', '지하철 건설기본계획 검토서' 등 각종 근거 자료가 잘 보존되어 사료로써 이곳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공사에 필요한 자료뿐만 아니라 기념엽서, 초대 승차권 등 지하철이 개통되고 난 후 발행했던 기념품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요.
무엇보다 지하철이 서울에 생기기까지 우여곡절이 꽤 많았는데요. 땅을 뚫어야 하고 처음 하는 대공사이다 보니 각계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또 기술 수준과 경제규모를 고려했을 때도 불가능하다 판단, 경제를 총괄하던 부총리는 "서울에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했을 정도로 강경하게 반대했다죠. 하지만 당시 교통난을 해결할 유일한 해결책이었기에 '정성으로 건설하여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라는 사명감으로 지하철을 건설했습니다.
전동차 부품
지하철 도입 여정을 봤다면 이젠 지하철을 움직이게 만드는 부품은 무엇이며 어떤 기술이 접목되어 있는지, 땅속에 길은 어떻게 내는지 볼 차례입니다. 주요 부품이 전시되어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신호기의 운행 원리와 신호 방식에 따른 차이는 무엇인지 등이 쉽게 설명되어 있어 이해가 쏙쏙 돼요.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이 파트엔 전동차 운전실 체험존이 있습니다. 스크린엔 신사역~압구정역~옥수역/구의역~강변역~잠실나루역을 운행하는 기관사 시점 영상이 재생되고 실제 지하철에서 들을 수 있는 안내 방송도 나와 리얼리티를 높입니다. 그 아래엔 폐전동차에서 가져온 직류 전용 운전대가 있고 직접 만져볼 수 있어요. 흡사 키자니아 간접 체험 같기도 한데 전동차 운전실이나 운전대는 평소 쉽게 볼 수 없어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렀다 가요.
레일 위의 서울
3, 4호선 굴착 공사 시 채취한 채취석을 활용한 건설 기념패
지하철의 등장은 도시 풍경을 바꿨습니다. 1기 지하철의 경우 1~4호선이 지나가는 을지로, 신촌, 영등포, 압구정, 서초, 잠실 중심으로 주거, 상업, 문화시설이 모여있는 역세권이 형성됐고 지하철 관련 시설(주차장, 지하상가)들도 확충되기 시작했습니다. 지하철의 수송분담률이 증가하고 주요 교통수단이 되면서 버스와 연계 수송 체계도 확립됐고 우리는 제한된 시간 내에 버스와 지하철을 오가며 환승도 할 수 있게 됐어요.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건 3, 4호선 굴착 공사 시 채취한 채취석을 활용해 만든 건설 기념패입니다. 한반도, 같은 서울인데도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채취석을 볼 수 있어요.
책도 볼 수 있고,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지하철역
(왼) 지하철 승하차 예절 안내 / (오) 에드몬슨식 승차권(aka 딱지 승차권)
요즘 지하철과 지하철역은 운송수단과 거점 그 이상의 역할도 하고 있죠. 저는 출퇴근길이나 지하철을 오래 타야 하면 전동차 안에서 독서를 해요. 그럼 시간이 훌쩍 흐르고 어느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거든요.
간혹 역사 내를 점령한 유혹적이고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에 이끌려 사먹기도 하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스크린도어에 있는 시민 공모 시를 읽기도 합니다. 갈증이 심하면 자판기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 필요한 물건을 있다면 스토리웨이(Storyway) 편의점에 들르고요. 참, 역 지하상가에서 쇼핑도 했었고 공연을 본적도 있네요.
이렇듯 도서관, 카페, 편의점, 공연장, 식당이 되어 의(衣), 식(食)부터 문화 예술 향유까지 역사는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이 되었고 전시는 변화한 역의 쓰임새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지하철을 탑니다
오늘도 익숙한 표지판을 따라 승강장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습니다. 충무로 역으로 가는 4호선은 한강 위를 달리며 들쑥날쑥한 도시의 마천루를 비춥니다. 가끔은 이 길목에서 하루의 피곤을 지하철에 두고 내리라는, 혹은 좋은 하루를 시작하라는 기관사님의 따뜻한 말을 들을 수도 있어요. 그럴 땐 잠시 귀에서 이어폰을 빼곤 합니다.
세기피앤씨가 있는 충무로 역은 3, 4호선 환승 통로 공간을 영화배우들의 캐리커처로 채웠습니다. '영화=충무로'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재미를 더한 단적인 예시인데요. 삭막하고 딱딱하게 놔두기보단 미감과 편리함 등을 고려한 승강장 내부 대자인 논의가 시작됐고 우리는 많은 역에서 장식 벽화, 예술 작품 등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지하철에 숨겨진 10가지 비밀을 찾아라!
시민 기증품
전시장 곳곳에 지하철과 관련된 퀴즈 10문제가 숨어 있고 이 문제는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리플릿에도 있어 아이들과 동반할 경우 리플릿을 들고 다니면서 정답을 써보는 활동을 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앞선 방식으로 아이들과 전시를 관람하는 부모님들이 계셨어요.
지하철 개통 관련 사료부터 시민 기증품까지 앞서 말했듯 이 전시는 하나의 거대한 아카이브입니다. 무엇보다 지하철은 서울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탔을,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관람하기 좋은 소재의 전시입니다. 제가 관람하는 동안 미취학아동부터 중장년층, 흰머리가 지긋한 어르신들을 모두 볼 수 있었는데요. 지하철 개통과 함께 세월을 보낸 분들이 몰랐던 사실에 감탄할 때 이 전시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서울의 지하철》은 역사이자 기록이었습니다.
《서울의 지하철》을 보고 나면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세워진 전차가 달리 보여요.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69년간 시민들을 날랐던 전차는 운행을 중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지하철이란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한 시대가 저물었어요. 하근찬의 소설 「전차구경(1976)」에 이 순간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중략) 그는 삼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전차와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지하철 건설 바람에 그만 전차와 함께 자기의 인생도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전차가 현대 물결 속에서 저문 만큼 지하철은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민 곁에 남을까요? 서울 지하철 개통 100주년 전시가 열릴까요? 확실한 건 십수 년 후에도 아침, 저녁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퇴근할 저, 저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겠네요.
《서울의 지하철》
· 일정: 24.08.09.(금)~11.03.(일) 09:00~18:00 (입장 마감 17시 30분, 매주 월 휴관)
-매주 금 21시까지 연장 운영
·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서울역사박물관
· 관람료: 무료
사용 제품|리코 GR3, GR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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