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앞이 시끌벅적합니다. 가을이 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거든요.
2019년과 2023년, 미술관 장터가 열린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 앞에는 하루 1만여 명의 발걸음이 찍혔습니다. 시장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은 예술처럼 진하고 풍부한 맛과 향, 정(情) 속에서 장터를 즐겼고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 장터'를 각인시켰습니다.
올해는 19년도에 이어 대안 장터인 농부시장 마르쉐@와 협력*, '더 예술적으로 더 지속 가능하게'란 주제에 걸맞게 친환경 정책을 시행해 방문객 스스로가 장바구니나 개인 식기를 지참할 수 있도록 사전 안내를 했었는데요. 미처 개인 식기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다회용 그릇 대여를 실시하기도 했고 텀블러를 지참한 사람들에게 브리타 물을 나눔 하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현장 곳곳에서 쓰레기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들이 엿보였습니다.
*2024년 MMCA 미술관 장터 협력사: 농부시장 마르쉐@, 열화당
미술관 장터와 협력한 농부시장 마르쉐@(이하 마르쉐@)*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2012년 혜화 예술가의 집에서 처음 시작된 마르쉐@는 우리가 먹고 사용하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소비하고 소통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에게 장바구니, 개인 식기, 다회용기 지참을 권장하며 지속 가능한 소비를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미술관 장터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궤를 같이 해요.
뿐만 아니라 마르쉐@는 지속가능성, 친환경을 중시하며 가치소비를 하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장터이기도 합니다. 사전 공지된 날짜에만 장이 열리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마르쉐@가 자리를 펼지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죠.
*마르쉐@: 시장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마르쉐(Marché)'에 장소 앞에 붙는 전치사 @을 붙여 만든 이름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열릴 수 있는 시장을 의미
장터가 열린지 30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미술관 마당은 이른 가을을 맛보고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시장 입구에서 푸른빛을 내는 가을 제철 과일 청귤의 반짝임이 심상치 않더니 사람들이 홀린 듯 모였고, 맛보기용 새콤달콤한 청귤 한 조각을 음미하는 이들의 표정은 신중하기도, 환하기도 합니다. 그 옆에선 판매자와 손님이 함께 꽃을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뒤로 줄을 선 사람들의 눈동자는 어떤 식재료를 살지 파악하느라 바쁘게 움직입니다.
본격적인 구경에 앞서 저도 청귤 한 조각 했습니다. 주황빛 과육은 신맛이 강했지만 뒤따라 오는 단맛이 새콤함을 적당히 중화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한 박스는 거뜬할 맛이었어요.
농산물 존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청귤과 포도, 하나의 작품처럼 고유의 색을 진하게 드러내는 채소들, 귀여운 용기에 담긴 꿀까지. 참여 업체가 키운 제철 농산물과 친환경 식재료가 모여있는 농산물 존입니다. 농산물 존에 있으면 왜 선조들이 음식에서도 색을 중요시했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어요. 그만큼 정성 들여 재배한 채소들이 고운 빛깔을 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채소를 구매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비닐 대신 종이봉투나 신문지를 사용해서 포장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사람들은 익숙하게 바스락거리는 포장을 받아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디자인/아트북 존
다양한 수공예품과 디자인 제품이 전시된 디자인 존, 예술 책 출판사와 디자이너 팀이 참여해 예술 관련 서적과 아트북, 디자인 북을 큐레이션 한 아트북 존입니다. 디자인 존 역시 플라스틱이나 비닐 포장재 대신 종이 완충재나 신문지를 사용하고 선보이는 제품도 친환경 소재로 만든 것들입니다.
시장엔 식재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찾는 물건들이 있어요. 식탁 위에 변화를 주고 싶게 만드는 식기와 기분까지 푸르게 만드는 식물들, 예뻐서 사용하기 아까운 DIY 소품들이 가득합니다. 또 하나, 디자인 존 가운데에서 가을을 발견했습니다. 차분한 뮤트 톤을 입은 소품들, 여름과 가을 사이에 볼 수 있는 야생화와 사초가 있었거든요.
푸드 존
단시간에 기분이 좋아지는 곳입니다. 구운 빵, 젤라또, 와인, 페스토 등 한 부스, 한 부스를 다 둘러볼 수밖에 없는 음식들이 한가득이에요. 시음, 시식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마음 같아선 호밀빵을 사 바질 페스토를 바른 뒤 커피 칵테일과 함께 입가심을 하고 구움과자에 와인을 곁들여 디저트 배까지 채우고 싶었지만 고심하고 고심해서 젤라또를 구매했습니다. 두 가지 맛을 고르면 와플 컵에 담아주는데요. 무화과 잎을 재료로 만든 젤라또는 처음이라 신기해서 무화과 잎 젤라또와 머루포도 소르베를 골랐습니다.
머루포도 소르베는 새콤해서 가장 처음 시식했던 청귤이 떠올랐고, 무화과 잎 젤라또는 슴슴한 맛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슴슴한 맛에 중독돼요. 두 가지 모두 단맛이 강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그만큼 호불호가 갈릴 듯했습니다.
로스터리 존
커피를 텀블러에 받아 가면 할인을 받을 수 있거나 원두 포장 용기를 지참하면 원두를 추가 증정하는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던 로스터리 존. 개성 있는 국내 로스터리 카페의 커피부터 커피 칵테일이란 생소한 음료까지, 오전부터 쨍쨍하게 햇빛이 타오른 날씨 속에서 로스터리 존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많았어요.
부스 근처로 가면 커피 내리는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아침부터 맡는 커피 향은 심신 안정제나 다름없었습니다. 늘 아침잠을 몰아내는 포션으로 마셨던 커피였는데 오랜만에 여유로이 커피 향을 맡을 수 있었어요. 미술관 장터에서 만난 소소한 행복이었습니다.
▷ 2024 미술관 장터 출점팀 확인하기
미술관 장터는 문을 닫았지만 농부시장 마르쉐@는 계속됩니다. 월별 일정은 마르쉐@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싱싱한 식재료와 맛있는 음식들, 함께 시장을 만들고 꾸려가는 이들의 모습이 피드에 한가득이라 조금만 스크롤을 내려도 마르쉐@에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요. 제가 이번 미술관 장터에 방문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또 장터 외에도 북토크, 테이스팅 같은 워크숍이나 공연이 열리기도 해요. 그럼 공간은 더욱 떠들썩해지고 활기는 끝없이 솟구칩니다.
처음엔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챙겨가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다회용기에 빵을 담아 가는 일, 식재료를 종이 포장지로 감싸는 일이 금세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집에 락앤락 빈 통이 몇 개 있는지 가늠해 보게 됩니다. 다음 장터 땐 한통 더 챙겨서 방문해야겠다는 계획과 함께 말이에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쉐@엔 마르쉐@와 뜻을 같이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고 손질하는 법, 먹는 법, 요리법, 요즘 생활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계절을 느끼고, 낯선 식재료를 익히고, 새로운 맛을 알게 되고, 간혹 음악을 들으며 시야를 넓혀갑니다. 사람들이 다시 이 시장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장터 규모는 장소나 협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규모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장소가 사소할지언정 그 속에 모인 사람들이 사고파는 물건, 주고받는 이야기는 강력하니까요.
<농부시장 마르쉐@ 9월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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