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에 마르고 호리호리한 그는 진중하면서도 가벼운 말쑥한 옷차림에 작은 책 한 권을 한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그는 차를 마시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주말 아침이면 항상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렸다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불러내던 그는 특히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네모난 안경 안에서 눈이 빛나며 이야기가 많아지곤 했습니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다소 많은 형이었지만, 항상 깍듯하게 저를 존댓말로 대하곤 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어린 제가 그에게 엥겔 지수가 참 높은 삶을 지향한다고 ‘엥겔 아재’란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여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단점이 하나 있다면, 술자리에서 누구도 술을 권하지 않아도 어느새 술잔을 높이 들고 한참을 응시하며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입안에 털어 넣곤 그대로 테이블에서 기절해 누군가는 그를 부축해 집에 데려다줘야 했다는 점입니다.
외모에서부터 취향까지 꽤 다른 그와 저는 사진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당시의 저는 색채와 구도로 시각적 강렬함을 주는 사진에 대해 매료되어 윌리엄 이글스턴, 스테판 쇼어, 마틴 파 혹은 라이언 맥긴리와 같은 작가의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는 정적이면서도 흑백의 대비가 매력적인 펜티 사말라티, 엘리엇 어윗, 마이클 케냐와 같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제 앞에 슬그머니 책 한 권을 놓고 갔었는데 바로 최민식 작가의 『휴먼 선집』입니다. 그와 저는 서로 사진집을 선물하기도 하고, 종종 가지고 있던 사진집을 교환해서 보곤 했기에 그가 아무 말 없이 건넨 그 사진집이 빌려준 것인지 아니면 준 것인지 모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로도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저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만큼 애착이 가서 여전히 제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최민식 작가의 사진은 사진이기 이전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록하고 저장한 방대한 작업물이기 때문에 사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최민식 작가의 사진을 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근데 대부분 대중들은 그 사진을 보며 감명을 받았었지만 그의 사진을 기록이라는 단편적인 측면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고, 저 또한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1928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민식 작가는 해방 후, 좋아하던 미술 공부를 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955년 일본의 도쿄중앙미술학원을 다니게 됩니다. 돈이 생길 때면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곤 했던 그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보고 완전 매료되어 헌 카메라를 구입하기에 이릅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최민식 작가의 아버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는 이야기를 항상 했고, 그는 1957년 한국에 돌아와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소속되며 본격적으로 서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최민식 작가는 지독한 독서광으로 사진 속에 인문학적인 요소를 담아 어려운 서민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그의 주 무대는 부산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자갈치 시장이었습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항상 꾀죄죄한 행색으로 사진을 찍고 다니는 최민식 작가를 보고 상인들은 ‘자갈치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어쩐지 친근하게 들리는 그 호칭으로 불리며 그는 이후로 무수한 고초를 겪게 됩니다.
1968년 동아 사진 콘테스트 입상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최민식 작가는 1968년에는 동아일보를 통해 첫 사진집 『인간 1집』을 출간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사진에는 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그들의 진솔한 모습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사진은 가감 없이 개발도상국으로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민식 작가가 명성을 얻을수록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은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이 되었고, 국제적 위상을 깎는 행위라 규정지은 정부에서 보기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하고, 운영하던 사진관의 운영을 방해받기도 하고, 필름을 폐기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작가에게는 회유책마저도 통하지 않았었는데, 최민식 작가는 자신이 담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머물던 자갈치 시장에서도 간첩 신고로 부지기수로 끌려가 조사받곤 했는데, 고액의 간첩 신고 포상금에 유혹 당한 상인들을 탓하기 이전에 그만큼 그의 행색은 간첩과 다를 바가 없을 만큼 남루했다고 합니다.
그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그 공로를 인정받기 시작했고, 2008년 그가 기증한 15만 점의 작품은 국가기록원에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간기증 국가기록물 1호로써 전례가 없었으며, 철저한 심사를 거친 최민식 작가의 작품들은 귀중한 국가의 기록물로써도 큰 가치를 갖는다 것을 의미합니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에서 ‘푼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사진이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 문화적, 감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스투디움은 사진을 보고 관객이 일반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 이해는 보는 이들의 지식 혹은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표면적이고도 보편적인 의미’의 지적이고도 객관적인 반응입니다. 최민식 작가의 사진은 기록물로써 스투디움을 품고 있는데, 그 속에서 강렬한 푼크툼도 함께 불러일으킵니다.
푼크툼은 보는 이들에게 따라 감정적으로 작용하는 개인적이면서도 주관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요소입니다. 푼크툼은 사진의 사소한 부분에서 예상하지 못한 정서적 반응을 강하게 일으킬 때 발생하는데, 스투디움과 다르게 보는 이들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푼크툼은 같은 사진을 보고 보는 이들마다 각기 다른 감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업고, 등 뒤로 밥을 먹이는 여인의 사진을 보면 나오는 일반적인 스투디움적 감상은 실내에서 제대로 앉히고 밥을 먹이지도 못할 만큼 일하느라 바빴던 개발도상국 시절의 한국 서민의 모습이라는 평일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이의 코에 흐르는 콧물을 보며 밖에서 보내야 했던 추웠던 겨울을 떠올렸을지 모르고, 할머니가 해주시던 잡채의 맛을 떠올렸을지도 모르며, 어머니의 등에 업혀 느껴지던 옷의 감촉을 떠올리며 푼크툼과 함께 사진을 감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이라며 강렬한 어조로 이야기했었습니다. 최민식 작가의 사진은 스투디움으로서 보편적이지만 소중한 가치를 가진 기록이자,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내온 이들에게 강렬한 푼크툼을 선사하며 작품으로도 큰 가치를 가집니다.
친구는 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며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을 건넸는지는 모르지만, 이미지의 미학적인 요소에 집착하던 저는 이후로 인문학적인 부분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와 저의 토론은 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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