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를 더듬다 보면 잊히지 않는 연도와 날짜가 몇몇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삼일절), 1945년 8월 15일(광복절), 1960년 4월 19일(4.19혁명), 1980년 5월 18일(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10일(6.10민주항쟁)처럼요. 여기에 2024년 10월 10일,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근현대사 한 페이지에 절대 마르지 않을 한 줄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계기로 다시 한번 회자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 된 광주와 5.18민주화운동, 518번 버스 투어 같은 것들이요.(참고로 어떤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특정되지 않았고, 『소년이 온다』 외에 『채식주의자』, 『이별하지 않는다』 등도 언급되었습니다.)
사실 올해 콘텐츠 중 하나로 518번 버스* 투어를 기획했다가 때를 놓쳐 내년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차일피일 미루던 중 12월 1일, 다소 즉흥적으로 광주로 떠났습니다. KTX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차분했던 감정은 첫 번째 장소에서 널따란 광장을 본 순간, 1980년 5월에 광주가 틔운 불꽃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짙은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실감하며 거세게 뛰었습니다.
*518번 버스: 군부대가 있던 상무지구를 출발해 주요 5.18 사적지 10여 곳을 경유하는 버스. 2004년, 5.18을 잊지 말자라는 취지를 담아 기존 25-2번 버스를 변경해 운영 중
[여행 경로]
광주송정역(🚋)→전남대학교(518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옛 전남도청 별관(🚶♀️)→5.18 시계탑, 전일빌딩245, 5.18 민주화운동기록관(518번 🚌)→5.18 기념공원(🚋)→광주송정역
*장소 옆 이동 수단은 출발지에서 도착지로 가기 위해 탑승한 이동 수단을 뜻함
전남대학교
초반에 여행 계획을 짤 때 국립 5.18민주묘지를 넣었었는데요. 외곽에 있는 데다가 배차 간격과 오가는 소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일정이 촉박할 것 같아 아쉽게도 이곳은 제외하고 전남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직접 차를 끌고 가는 것이 좋아요.
전남대학교는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1호입니다.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전남대학교에서 일어났었죠.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임을 알리듯 전남대 곳곳엔 5월 18일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민주길'처럼요. 전남대학교는 교내 민주화 운동의 정신, 인물, 장소들의 기념공간을 정비하고 이들을 하나로 잇는 문화공원 개념의 민주길을 조성했어요.*
*출처: 전남대학교 민주길(518trail.jnu.ac.kr)
전남대 정문은 민주길 중 하나인 '정의의 길'의 시작점인데요. 이날은 정문을 시작으로 메타세쿼이아 길과 '정의의 길' 코스 중 하나인 5.18 광장을 보고 왔습니다. 광주엔 아직 가을이 머무르고 있어 메타세쿼이아 길은 잎이 붉게 물든 기다란 나무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어요.
메타세쿼이아 길, 전남대 5.18 연구소가 있는 용봉관까지 지나자 널따란 5.18 광장이 보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기념비적인 장소와도 같아 전남대는 2020년, 5.18 광장을 새롭게 조성해 많은 이들의 열망과 외침을 알리고 있어요. 광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흰색 건물로, 도서관 별관이에요. 5.18 광장을 소개하는 안내문 속 사진에 있는 똑같은 흰색 건물. 이번 여행 내내 역사를 지나온 건물을 실제로 보는 일은 여러 가지 어려운 감정을 동반했습니다. 그 감정에 형태를 부여한다면 아마도 경악, 분개, 공포, 긍지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저는 '정의의 길' 일부 코스만을 보고 나왔지만 민주길은 '정의의 길', '인권의 길', '평화의 길'까지 3개 노선이 있고, 각 코스에서 민주화를 위해 저항하고 투쟁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공간을 볼 수 있으니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둘러보시길 바라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옛 전남도청 별관
전남대학교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가기 위해 드디어 518번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전남대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가는 버스가 (환승 포함) 몇 대 더 있지만 버스는 518번만 이용했어요. 배차 간격이 긴 버스라 도착 시간을 잘 확인해야 하니 518번 버스 투어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그 시점에 먼저 도착하는 버스 노선을 이용해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옛 전남도청 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5.18민주화운동의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승화한다는 배경에서 출발해 2015년 개관한 곳이에요. 광주의 대표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해 광주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요. 때마침 ACC FOCUS 《구본창: 사물의 초상》과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가 복합전시관에서 열려 1시간 넘게 오로지 전시에만 몰입했어요.
게임 엔진 기반 컴퓨터 그래픽 영상,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전시는 SF 단편 영화를 연상케 하는 퀄리티와 스토리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을 그 자리에 못 박아두었고요. 《구본창: 사물의 초상》 전시가 인상 깊었던 건 작품을 배치하고 보여주는 방식이었어요. 광활한 전시장을 십분 활용하여 <백자> 작품을 천장에 걸어둔다거나 커다란 라이팅 박스로 선보여 마치 설치 예술 같았습니다. 광주에 방문 예정이라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두 전시 모두 관람하는 것을 추천해요.(무료입니다!)
*ACC FOCUS 《구본창: 사물의 초상》 24.11.22.(금)~25.03.30.(일) / 복합전시 3, 4관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24.08.30.(금)~25.02.16.(일) / 복합전시 1관
5.18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은 현재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건물 일부만 볼 수 있어 바로 전일빌딩245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도보로 바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있어요.
5.18 시계탑, 전일빌딩245,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나오자 5.18 민주광장, 시계탑, 민주의 종, 그리고 전일빌딩245가 차례대로 보였습니다. 한창 성탄 행사가 준비 중인 민주광장을 지나 매일 오후 5시 18분이 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시계탑으로 갔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전남대학교 5.18 광장에 있던 기념상 이름이 '임을 위한 행진'이란 것이 떠올랐습니다.
시계탑 뒤로는 전일빌딩245,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과 헬기 사격의 흔적이 확대한 것처럼 크게 보입니다. 이 총탄은 건물 외벽뿐만 아니라 내부 기둥, 바닥에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고 그 모습은 10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내부를 촬영하진 않았지만 당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고 왜곡된 정보는 무엇인지 잘 설명되어 있으니 내부도 한번 둘러보세요. 그런 다음 참담한 감정을 5.18 민주광장과 무등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 덱이 있는 옥상에서 털어내시고요. 그래야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갈 수 있어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80년에 있었던 일을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증픔부터 4,200여 권에 달하는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정부기관과 군사 법정 자료, 언론인들의 취재 수첩과 3,700여 컷의 사진 필름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요.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보여주고 있다 보니 봐야 할 것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지만 그만큼 5.18민주화운동을 잘 알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옛 전남도청부터 시계탑과 전일빌딩245, 금남로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문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였습니다. 민주광장부터 뻗어 나가는 금남로, 그 길에 세워진 전일빌딩245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마치 역사의 증인 같았습니다. 아니, 증인이겠죠.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있지만 일상처럼 대할 수 없게끔 만드는 듯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건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니까요.
또 한국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영향력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이렇게 한 도시 전체가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한 노력 덕에 현재가,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곳은 늘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5.18 기념공원
얼핏 보면 일반 근린공원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아!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란 주제로 지상과 지하 곳곳에 오월 영령을 추모하는 시설물이나 공간, 조형물을 볼 수 있는 5.18 기념공원을 마지막 코스로 정했습니다. 운천역 2번 출구로 나와 약 10분가량 걸으면 삐죽삐죽 솟은 기둥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 앞으로 5.18지상인물상이 위엄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5.18지상인물상이 있는 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태극 문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부감 사진은 근현대사 아카이브(archive.much.go.kr)에서 '5.18 기념공원'을 검색하면 볼 수 있습니다.
지상인물상 뒤로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있고 그곳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과 함께 지하인물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5.18지상인물상 근처엔 당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요. 또 한 번 무거워진 마음을 산책하는 주민들, 냄새 맡기에 여념이 없는 반려동물들, 계절이 묻은 공원을 보며 털어내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는 사실은 털어내지 않고서요.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5.18 기념문화센터까지는 가지 못하고 지상인물상 근처를 돌아다니다 역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한강 작가는 현지 시간으로 10일(화) 오후 5시(한국 시간으로는 11일(수) 자정)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메달과 증서를 받을 예정입니다. 그가 글로 써 내려간 역사의 메시지가 한국사(史) 뿐만 아니라 세계사(史)에도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순간이겠죠.
지난 7일(현지 시각)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라고 말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서 시작된 광주의 불꽃은 현재 대한민국의 어디에 있을까?
*노벨위원회가 제공한 강연 전문에서 발췌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내가 있던 세계가 반쯤 뒤집혔습니다. 완전히 전복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불꽃의 힘을 빌려 땅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있다가 별안간 떠올랐습니다. 피와 눈물로 이룩한 한국 민주주의 76년 역사는 쉽사리 뒤집히지 않으리란 믿음이, 열망이, 간절함이 곧 불꽃이 아닐까 하는 것을요.
쑥스초코파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이어 광주에 가면 꼭 들리고 싶었던 곳, 쑥스초코파이입니다. 1913 송정역시장에 있는 수제 초코파이 가게예요. 끓인 쑥을 넣어 만든 반죽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거문도 해풍쑥 초코파이와 논산 딸기 초코파이를 구매했고 겉에 초코 필링이 되어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초코파이 식감보다는 빵에 더 가깝습니다.
거문도 해풍쑥은 쑥 향이 강하지 않아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을 듯했고 생각보다 달지 않았어요. 저는 맛있었지만 달콤한 디저트를 예상한 분들에겐 불호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논산 딸기엔 새콤한 딸기 퓌레가 필링 되어 있는데 크림과 엄청 잘 어울립니다. 새콤달콤함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초코파이에요.
·위치 및 영업시간
(본점) 광주시 광산구 송정로8번길 27 / 월~금 10:00~18:30, 토~일 10:00~20:00
(서울 지점) 서울시 종로구 종로32길 25 / 월~목 10:00~19:00, 금~일 10:00~20:00
· 주요 메뉴
-거문도 해풍쑥 초코파이 4,200원
-해풍쑥 인절미 초코파이 4,500원
-논산 딸기 초코파이 4,400원
-거문도 해풍쑥 스콘 4,300원
·인스타그램
숙이네 생오리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이 휴무일이었습니다. 광주에 와서 오리탕을 먹지 않고 가자니 아쉬워 광주송정역 근처를 검색, 오리탕을 판매하는 곳을 발견해 들어간 곳이 바로 숙이네 생오리입니다. 점심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고, 저녁시간은 아닌 애매한 시간이라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브레이크 타임이 없었습니다.
들깨가 듬뿍 들어간 오리탕은 맑은 탕, 찌개보다는 걸쭉한 죽에 가깝습니다. 뼈해장국과 매운탕을 섞은 듯한 맛 속에서(개인 감상입니다. 하지만 국물이 정말 맛있었어요.) 매콤함과 칼칼함, 미나리 향이 동시에 밀려 들어오고 그 조화가 꽤 좋았어요. 날이 제법 쌀쌀했는데 언 몸이 싹 녹는 맛. 하지만 오리고기를 한 입 먹었을 땐 오리 특유의 냄새가 강해 개인적으로는 국물과 미나리만 먹을 때 훨씬 맛있었어요.(물론 고기도 다 먹었습니다.)
어묵볶음, 감자채 볶음 등 같이 나온 밑반찬은 제 입맛엔 간이 조금 센 편이었지만 동시에 감칠맛이 싹 돌아 밥이 꿀떡꿀떡 잘 넘어갔어요. 덕분에 뜨끈한 속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 위치: 광주시 광산구 송정로8번길 6-3
· 영업 시간: 매일 11:00~23:00
· 주요 메뉴
-오리탕 10,000원
-오리주물럭 한 마리 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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