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참 신비롭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완성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퇴색되는 것도 있지요. 순간이기에 찬란하면서도, 영원하기에 경이롭습니다. 이런 시간의 모순을 담은 작가의 개인전을 다녀왔습니다. 바로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의 《RENASCENCE》 전시입니다.
칸디다 회퍼는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작가지요. 회퍼의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작가의 작품을 보면 알아볼 만큼 자신만의 사진 철학이 명확하고 그 길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습니다. 칸디다 회퍼는 사진을 회화적으로 발전시킨 베허 학파의 1세대 중 하나로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사랑을 받는 회퍼 개인전을 국내에서 4년 만에 다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칸디다 회퍼 《RENASCENCE》
칸디다 회퍼 <Komische Oper Berlin II 2022> ⓒ국제갤러리
칸디다 회퍼 <Komische Oper Berlin II 2022> ⓒ국제갤러리
칸디다 회퍼의 작품은 그 자체로 아이코닉합니다. 인류가 완성한 공간에서 인간을 비우고 공간만을 담습니다. 그래서 흔히 회퍼의 작품을 ‘공간의 초상’이라고 하죠. 인공조명 없이, 공간 이용객에 대한 통제도 없이, 그저 기다립니다. 공간이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시간을요. 어느 날은 셔터를 길게 열어 사람의 궤적을 기록하는 동시에 인형(人形, 인간의 형상)을 지우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그 공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존재를 함께 기록하기도 합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다가도 공간 본연의 순간을 담지 못한 날엔 다시 돌아와 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래 보고 오래 만나며 명징하게 그 공간을 기록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이 ‘초상’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요.
《RENASCENCE》 간담회에서 만난 칸디다 회퍼
《RENASCENCE》 전시 1층 | <Komische Oper Berlin VI 2022> 와 <Komische Oper Berlin VII 2022>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의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해 온 회퍼는 이제 《RENASCENCE》라는 제목으로 과거와 현재의 동일한 공간을 담았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방문한 장크트갈렌(St. Gallen) 수도원 도서관이나 10년 만에 다시 촬영한 베를린 신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 등, 이전에 기록한 그러나 새로이 기록된 14점의 신작을 선보입니다.
회퍼가 다시 방문한 이 공간들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리노베이션을 진행한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직접 본다면 의아할 겁니다. 어디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를 만큼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복원된 건물들이니까요. 칸디다 회퍼는 다시 이 공간들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대로인, 하지만 변화한 이 공간들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고 기록합니다.
《RENASCENCE》 전시 1층 | <Komische Oper Berlin II 2022> 와 <Komische Oper Berlin IV 2022>
《RENASCENCE》 전시 1층 | 〈Musée Carnavalet Paris I 2020〉 과 〈Musée Carnavalet Paris XXI 2020〉
《RENASCENCE》 전시 1층 | 〈Musée Carnavalet Paris XI 2020〉
전시의 타이틀은 ‘르네상스’. 직역하면 ‘다시 태어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유럽 역사에서 학문과 예술이 부흥하는 시기를 의미하기도 하죠. 1층에 전시된 파리의 카르나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의 무도회장 벽화와 베를린의 코미셰 오페라(Komische Oper Berlin)의 무대와 객석을 담은 작품은 강렬한 붉은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그저 공간이 가진 붉은 색을 연이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가 왜 ‘르네상스’가 되었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카르나발레 박물관의 리노베이션을 담은 작품에서는 100년 전에 그려진 붉은 벽화 사이로 흑백의 선명한 철제 계단이 도드라집니다. 과거의 예술을 보존하며 모던함을 융화시킨 공간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낸 것이죠.
《RENASCENCE》 전시 2층
〈Neue Nationalgalerie Berlin XI 2021〉
〈Neue Nationalgalerie Berlin XVII 2021〉
전시관 2층에서 감상할 수 있는 베를린의 신국립미술관 외관 두 점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건물로 미술관 자체는 변함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회퍼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미술관 유리 외벽에 비친 주변 건물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게 회퍼의 작품은 시간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2층의 또 다른 작품인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서관 작품에서는 외부적 시간이 아닌 작가의 시선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의 도서관에서는 아치형 천장에서 그 공간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새롭게 촬영한 도서관에서는 내부 공간을 담아 작가가 느끼는, 또는 변화한 공간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해냅니다.
〈Stiftsbibliothek St.Gallen I 2021〉
〈Stiftsbibliothek St.Gallen III 2021〉
칸디다 회퍼의 이번 전시 작품들은 모두 팬데믹 시기에 촬영되었습니다. 모든 공공장소가 닫혔던 그 시기를 생각하면 수많은 리노베이션이 그때 진행되었던 것이 이상하지 않죠. 이로 인해 회퍼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도 완벽히 인간이 부재하는 공간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텅 빈 공간에서 팬데믹의 상흔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회퍼는 팬데믹과 상관없이 아주 오래도록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의 공간을 주시해왔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지요. 역사가 담긴 작가의 오랜 시선을 따라 그저 그가 보여주는 공간의 얼굴을 고요히 바라보게 됩니다.
《RENASCENCE》 간담회
《RENASCENCE》 간담회
회퍼와의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동안 회퍼는 촬영의 의도나 의미에 대한 말을 아꼈습니다. 자신은 그저 리노베이션 이전과 이후의 공간을 찍었으며 강렬한 색채 역시 공간이 가진 것이라고요. 그리고 모든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감상하는 개인의 경험으로 작품을 느끼는 마음이 바뀌었을 수 있다고 말이죠.
사실 회퍼의 사진은 그의 답변처럼 명확합니다. 공간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기록하죠. 과장도 축소도 없이, 그저 찍습니다. 회퍼에게 공간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는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카메라를 잘 놓을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라고요. 초상(portrait)이란 그런 것이죠. 프레임 속 대상을 가장 잘 담는 일입니다. 회퍼의 작품이 ‘공간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유가 바로 회퍼의 이런 지점이 사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표정과 주름에 삶이 담기듯 회퍼가 기록한 공간의 초상은 공간의 시간을 담아내겠지요. 그 이야기를 찾는 건 아마도 우리의 몫일 겁니다.
칸디다 회퍼 개인전 《RENASCENCE》
칸디다 회퍼 개인전 《RENASCENCE》
칸디다 회퍼 개인전 《RENASCENCE》
각자의 감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회퍼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번 들여다보고 오래 바라보고 싶은 작품’이다. 회퍼가 공간에게 그러했듯 우리도 그의 작품을 가만히 그리고 고요히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에게 칸디다 회퍼의 전시는 어떻게 다가올까요? 칸디다 회퍼가 당신의 시선을 기다립니다.
· 전시 기간: 24.05.23.(목)~07.28.(일)
· 관람 시간: 월~토 10:00~18:00, 일 10:00~17:00
· 위치: 국제갤러리 서울 K2(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 관람 요금: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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