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삼각대가 어떤 삼각대였는지 아직도 떠오릅니다. 남대문 지하 상가에서 샀던 까만 빛깔의 플라스틱 삼각대는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을 받아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등 뒤의 진열장에서 꺼내어 툭 건네준 아저씨의 강제적 추천이었습니다. 그 돈이 전부였던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삼각대는 아마 그게 전부였을 것입니다.
조악한 품질의 그 삼각대는 조작은 영 어설펐고, 헤드의 나사들은 꽉 조여도 카메라는 자꾸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나사를 너무 꽉 조이면 금이 간 이음새 부분이 벌어져 더 헐거워질 수 있으니 ‘적당히’ 조여야만 하는 그 삼각대는, 그럼에 불구하고 가벼운 주머니 사정 덕분에 꽤 오래 사용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삼각대의 헤드를 고정시킬 때면 수많은 작가들이 사랑한다는 ‘짓조(Gitzo)’의 삼각대를 촤라락 펼쳐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위에 카메라를 얹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삼각대들을 사용하며 그렇게 동경하던 짓조 삼각대를 실제로 장만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렇게 짓조의 삼각대를 장만한 이후에는 십 수 년간 다양한 카메라가 거쳐 가는 동안에도 몇 개의 삼각대가 늘어나긴 했지만, 주로 사용하는 삼각대는 짓조였습니다.
1917년, 프랑스 파리에서 아르세니 기차드(Arséne Gitzhoven)에 의해서 카메라 장비 브랜드로 설립된 짓조는 품질을 앞세워 영역을 확대해 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생산에 차질을 겪었던 짓조는 이후에 고급 삼각대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는데, 1960년대에 이르러선 고급 삼각대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경쟁사들과 차별화된 소재를 사용하여 가볍고 튼튼한 삼각대를 생산해 내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에는 ‘G-Lock’라는 삼각대 잠금 메커니즘을 개발해 혁신을 이루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형태로 보이는 이 시스템은 당시에는 사용자 편리성을 고려한 획기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삼각대 다리의 각도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하는 등의 발전을 거듭하는데, 1990년대에 이르러선 카본 파이버를 삼각대에 도입하면서 압도적인 성능과 인지도로 고급 삼각대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자리잡게 됩니다.
1992년에 미디어 장비 관련 거대 기업인 ‘Videndum PLC(비덴덤 그룹, 이전 명칭 Vitec Group)’에 인수합병이 되면서 짓조는 품질 유지와 신제품 개발, 그리고 마케팅과 같은 부분에까지 큰 이점을 얻고 명성을 더해갔습니다.
짓조는 크게 3개의 라인업을 가지고 있는데, ‘마운타이너(Mountaineer)’ 시리즈는 전천후를 추구하는 삼각대로 이름처럼 풍경, 자연, 등산과 같은 활동적인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트래블러(Traveler)’ 시리즈는 휴대성과 경량화에 집중한 삼각대로 여행가들이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면서도 견고하게 만들어져 제 성능을 발휘하는 삼각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스테매틱(Systematic)’ 시리즈는 모듈형 구조를 채택한 삼각대로서 그 구조를 통해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가집니다. 시스테매틱 시리즈는 마그네슘과 카본을 활용하여 지지하중을 높이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삼각대 다리를 기초로 모듈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센터 컬럼이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센터 컬럼으로 인해 불필요한 흔들림을 애초에 배제했습니다. 센터 컬럼이 배제되어 있다지만 플레이트를 활용하여 기존의 헤드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전용으로 설계된 헤드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듈로 존재하는 센터 컬럼을 장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는 센터 컬럼이 주는 편리함이라는 이점을 활용하거나 레일이나 더블 플랫폼과 같은 부가 장비를 장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플레이트를 제거하고 하프 볼 컵을 장착하면 비디오 헤드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상황에 따라 사진용 삼각대로 쓰다가 비디오용 삼각대로 변경해가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자, 그럼에 불구하고 강성과 유연함을 모두 갖춘 삼각대로서 어느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진용 장비에 비해 무게가 가중되는 영상용 장비를 비디오 헤드와 함께 올려 두어도 불안정함이나 불편함은 없습니다.
짓조의 eXact 기술을 적용한 카본 파이버 가공 기술, 부드럽고도 단단한 G-Lock Ultra 시스템, 모듈 형태의 구조와 같은 기술들은 지금에 와서는 무수히 많은 후발 주자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은 짓조의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재료 공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꽤 유사한 성능을 가지면서도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 소비자들의 입장에선 선택지가 무수히 다양해졌습니다.
다만 삼각대란 장비는 활용면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 수 없다면 그 가치는 의미 없는 물건입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쌓아온 짓조의 신뢰는 단순히 훌륭한 제품이라는 것을 넘어서 헤리티지를 가진 절대적인 신뢰로써 진정한 ‘명품’을 의미합니다.
짓조의 제품에 공통적인 특징인 은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며 오돌도돌하게 가공된 블랙 누아르 데코는 여전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렙니다. 훌륭한 성능의 삼각대는 짓조 이외에도 있을 수 있지만, 세월을 넘어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낡아가는 반려 장비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짓조 이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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