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오징어 게임> 등 굵직한 오리지널 시리즈나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덕에 우리에게 넷플릭스는 주로 재미있는 영화, 드라마를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이죠. 알고 보면 넷플릭스는 사실 다큐멘터리 맛집입니다.
넷플릭스가 다큐멘터리 맛집이란 소문을 듣고 <욕의 품격>을 시작으로 장르도, 소재도, 표현 방식도 모두 다른 다큐멘터리를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시청했습니다. 흔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또 다른 장르라고 말합니다. 기존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소재에 직접적으로 접근해 우리 삶에 만연해진 문제를 정면에서 조명하고 핵심을 찌르는 등 새로운 지점들이 많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평이 나온 이유를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형화된 다큐멘터리만 떠올렸던 제 머릿속을 박살 냈어요.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화면 캡처
추천을 받았거나 제목에 이끌려 본 다양한 다큐 중 5가지를 선정했어요. 내용, 재미, 교훈은 기본, 도파민까지 보장합니다. 짧은 듯 길고 긴 듯 짧은 설 연휴 동안 재미있는 일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에요.
욕의 품격(History of Swear Words, 2021)
· 청소년 관람 불가
· 6부작
· 편당 20~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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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평생 들을 F*ck을 이 다큐멘터리에서 다 들은 기분입니다. 재생 바가 오른쪽 끝에 다다를 때면 귀에서 이 단어가 메아리쳐요. 또 다큐멘터리가 맞는지 살짝 의심도 듭니다. 그만큼 기존의 형식을 깨부순 다큐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소개를 살펴보면 '대놓고 불경하고, 기막히게 웃기며, 은근히 교육적인 시리즈'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히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멘트입니다.
<욕의 품격>은 F*ck 외에도 S*it이나 D*mn 등 남사스러운(?) 영어 단어들의 어원과 유래 등을 재미있게 펼쳐냅니다. 오프닝에서 1분에 F*ck을 n번 소리치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르가 코미디로 분류됐듯이 <욕의 품격>은 다큐멘터리 섹션에 있지만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원과 유래, 활용법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깊게 파고들지는 않아 킬링 타임용으로 좋아요. 영어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나 여러 나라의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두어도 딱히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지만 재미는 확실히 있습니다.
지금 구매하세요: 쇼핑의 음모(Buy now, 2024)
· 12세 이상 관람
· 1시간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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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지금 구매하세요: 쇼핑의 음모>는 결제하기 문턱에서 몇 번을 주저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눈앞에 미국의 높은 마천루까지 쌓인 쓰레기들이 아른거리거든요. 감독은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무분별한 구매를 개인의 문제로 꼬집진 않지만 영상을 본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비 행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인가? 아직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뒤따라 오는 질문은 덤이고요.
기업은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이기 위해 소비자들의 구매를 촉진하는 다섯 가지 원칙을 적극 활용합니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소개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해요. 빅스비, 시리 혹은 나비스 같은 인공지능 음성이 영상을 시청하는 우리를 생산자나 기업으로 대하고, 기계적인 음성임에도 묘하게 설득력이 담겨 있어 하는 말들이 전지전능하게 느껴집니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치트키처럼요.
기업들이 각 원칙을 적용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꽤 충격적입니다. 아마존처럼 글로벌 인터넷 플랫폼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증언과 반성은 기업의 행태가 거짓이 아님을 뒷받침하고요. 이 순간 자칫 (기업의 전략에 현혹돼 과소비를 한) 개인의 잘못으로 화살을 돌릴 수도 있지만 개인의 반성으로만 치부하기엔 전 세계적으로 과생산과 과소비로 버려지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요. 개개인이 소비를 줄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예요. <지금 구매하세요: 쇼핑의 음모>는 버려지는 물건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종착지까지 보여줌으로써 쐐기를 박습니다.
조금 긴 편이지만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작품이고 지루하지 않아 1시간 24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양의 물건 때문에 물건에 질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쇼핑 억제에 이만한 다큐멘터리가 없어요.
시청률 살인(Killer Ratings, 2019)
· 청소년 관람 불가
· 7부작
· 편당 43~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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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평소 <그것이 알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즐겨보거나 미제 사건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흥미로울 다큐멘터리 <시청률 살인>입니다. 브라질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다뤘으며 브라질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방송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왈라시 소자의 이야기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왈라시가 브라질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호스트로 있던 프로그램 <카날 리브리>에서 흉악 범죄를 보도하고 이를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왈라시가 범죄자로 체포되면서 브라질 사회는 크게 술렁이게 됩니다.
왈라시가 체포된 이유는 범죄 사주. 시청률을 올리고 명망을 쌓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는 예전 방송분을 재조사하고 증거물을 확보하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진상을 파헤칩니다. 그 과정이 매우 긴박하게, 자세하게 그려져 흡입력이 대단해요. 또 탐사보도 기자, 전담팀 형사, 검사장과 왈라시 소자의 아들, 운전기사, 카날 리브리 스태프의 상반된 의견을 교차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이 편향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는 정말 권력을 등에 업고자 추악한 짓을 저지른 희대의 범죄자였을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모함으로 위기에 빠진 정의로운 정치인이었을까요?
참고로 당시 <카날 리브리>에선 범죄 현장을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 없이 그대로 송출했습니다. <시청률 살인>에서도 <카날 리브리>의 방송 자료를 수정 없이 사용해 훼손된 시신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니 시청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풍미 원산지(Flavorful origins, 2019)
· 전체 관람가
· 10부작
· 편당 11~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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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눈에 미뢰가 달렸나 싶을 정도로 눈으로 온갖 맛이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러닝타임이 짧아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금세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어요. 백종원 없는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단편 버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식의 나라 중국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음식의 역사가 길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음식이 많습니다. <풍미 원산지>는 3개의 시즌에 걸쳐 차오산, 원난, 간쑤 요리를 소개했는데요. 넷플릭스에선 현재 간쑤 편만 시청 가능하며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레이션도 중국어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다큐가 중국 지방 로컬 푸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음식과 연결된, 예컨대 조리법과 재료, 그 재료가 나고 자라는 환경을 같이 보여줘 로컬 푸드를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간쑤 편에선 양고기부터 메밀, 감자까지 다양한 재료를 볼 수 있는 무엇보다 재료를 채취하고 다루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이기도 하고요. 저는 잘 보다가 우육면 편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저녁에는 보지 마세요. 냉장고를, 배달 앱을 수십 번 여닫게 되니까요.
헤로인 vs. 히로인(HEROIN(E), 2017)
· 15세 이상 관람
·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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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e 스펠링 하나 빠졌을 뿐인데 영웅이란 단어가 악명 높은 마약 헤로인이 됩니다. HEROIN(E)이란 강렬한 타이틀을 뒤로하고 등장하는 사람은 소방서장, 마약 법원 판사, 사회복지사입니다. 소방서장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헌팅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판사는 친근하고 푸근한 말로 마약 중독자들에게 법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한편 재기를 돕습니다. 붙임성 좋은 사회복지사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중독자들을 돕는 일에 서슴지 않고 나섭니다.
<헤로인 vs. 히로인>은 마약 자체의 위험성, 중독에 빠진 환자들 대신 이들을 구하는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마약이 불러올 개인의 붕괴, 지역사회의 붕괴, 트라우마에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이 일을 오랫동안 해온 소방서장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처치하지만 갓 사회에 뛰어든 젊은 청년들은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를 축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명의 히로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약과 싸우지만 해마다 마약을 투여하고, 마약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증가합니다. 다큐 내내 응급 무전이 끊이질 않아요. 법정엔 늘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길거리엔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지역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함과 걱정 속에서도 히로인들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지킵니다.
마약이란 소재가 주는 파괴감을 생각한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제법 정적입니다. 긴박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본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기억에 남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노력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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