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에 관심이 생겨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서 검색을 좀 해보면 안다. 얼마나 어려운지. 대체적으로 나온지 오래 된 카메라뿐이라 '중고'라는 점을 감안하고 거래를 하겠다 마음을 먹으면 그때부터는 더 많은 어려움과 경험 부족 속에서 고초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샵에서 구매할 것인지, 개인 간의 거래를 진행할 것인지부터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와 고장 걱정을 생각하면 필름이고 뭐고 안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박싱이 가능한 필름 카메라가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펜탁스 17.
무려 20여년 만의 신제품
카메라의 생김새는 심플하다.
펜탁스에서 필름 카메라를 출시한 건 어림잡아 20년 정도 됐다. 그만큼 필름 카메라가 새롭게 출시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일단 카메라를 처음 받아봤을 때 언박싱을 한다는 느낌이 새롭다. 그 전에 중고로 거래할 때는 풀박스 제품이라고 해도 기본 20~30년 정도된 제품이라서 언박싱보다는 보물 상자 개봉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존재만으로도 카메라 중고값을 지켜줄 부적마냥.
언박싱 만큼이나 새로운 건 펜탁스 17은 기존 제품의 리뉴얼, 복각 버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설계부터 다시 시작한 새로운 카메라다. 재발매하는 라이카 M6와 롤라이가 아닌 민트 카메라에서 복각한 롤라이 35 AF와는 비교 불가다. (물론 소비자의 선택지가 늘어난 점은 환영)
그만큼 펜탁스 17은 멈춰있던 필름 카메라의 시간을 다시 돌린 상징적인 카메라다. 디자인부터 볼까. 세로형 뷰파인더가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부분은 개인 취향의 영역이라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확실히 하프 포맷 카메라라서 도드라져 보이긴 한다. 그렇다면 펜탁스는 왜 이런 상징적인 카메라를 하프 포맷으로 출시했을까?
요즘 시대에 걸맞는 카메라
디자인도 볼수록 매력이 있다.
펜탁스 17은 일반 35mm 필름 규격인 36x24mm에서 절반만 사용한다. 즉, 일반적으로 필름에서 정해놓은 컷 수보다 2배나 더 촬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필름이 비싼 시기에는 36장짜리 필름 한 롤로 72장이나 촬영할 수 있다. 물론 이미지 퀄리티는 35mm 필름 규격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필름의 감성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전혀 없다.
또한, 펜탁스 17이 하프 포맷을 채용한 건 전략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사진은 가로보다는 세로 사진을 더 많이 촬영하게 됐다. 그렇게 촬영된 사진은 세로 포맷에 어울리는 인스타그램에서 소비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찍기만 하면 인스타그램 피드, 스토리에 업로드 시 최적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펜탁스 17의 하프 포맷을 채택한 이유에 무릎을 ㅌㄱ치게 되고, 요즘처럼 필름 값이 비쌀 때는 마음 놓고 촬영할 수 있다.
아, 하나 팁을 주자면 현상소에 갔을 때 꼭 하프라고 말하면 한장씩 받을 것인지, 두장 합쳐진 걸 받을 건지 고를 수 있다. 이미지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골라 선택하면 된다. 하프니까 자르지 않으면 한 장에 두 이미지가 들어가는데 연속성을 살리는 촬영본을 원하면 그대로 받고, 아니라면 한 장씩 잘라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물론 약간의 추가금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연속성을 살리고 싶다면 현상 스캔할 때 그냥 받는다고 하면 된다.
편한 사용성

펜탁스 17에 적용된 렌즈는 HD 코팅이 적용된 렌즈라 결과물만 봐도 ‘오 좋은데?’ 싶은 경우가 많았다.
펜탁스 17을 가지고 8롤 정도 찍어 봤다. 컷 수로는 대략 580장 이상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들고 다니며 가장 만족스러운 점이 뭐뭐냐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들고 다녀도 부담없이 가벼운 290g의 무게다. 이렇게 가벼운 무게를 실현할 수 있었던 점은 구조적으로 복잡하지 않은 렌즈와 재질을 꼽고 싶다.
첫 인상에선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 재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펜탁스 17의 상판과 하판은 마그네슘 합금을 쓰고, 검은색 바디 부분과 렌즈 부분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라는 고성능 재질을 사용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깨지거나 변형되지 않는 강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벼운 무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렌즈 또한 가볍지만 일회용 렌즈랑 비교 당하는 건 펜탁스 17 유저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일이다. 환산화각 37mm 정도 되는 이 렌즈는 F3.5 조리개와 최신 HD 코팅이 적용되어서 써보면 확실히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에 대응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화질 또한 최고는 아니지만 무게와 타협한 것 치고는 결과물이 좋다.
목측식은 어렵지 않다.
목측식 방식에 적응되면 MF보다 빠르게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정 어렵다면 AUTO 모드라는 선물이 있다.
펜탁스 17은 기본적으로 존 포커스 시스템을 채용했는데, 목측식은 쉽게 말하면 눈대중으로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냥 눈대중으로 모든 걸 맞추려면 너무 어려워진다. 그리고 렌즈의 구조적인 부분 때문에라도 초점 거리를 미리 세팅해두는 모드를 6가지나 준비하는 방식으로 대비했다. 렌즈에 표기가 되어 있지만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아도 어떤 모드를 설정해놓은지 알 수 있어 촬영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내가 설정한 모드가 얼만큼의 거리를 커버하는지 정도는 촬영 전 사용 설명서를 통해 미리 알고 간다면 더욱 촬영에 좋다.

AUTO 모드로 설정해두면 렌즈의 거리 설정과는 상관없이 촬영한다. 단, 플래시도 오토모드이니 광량을 항상 체크해야 한다.
P모드 뿐만 아니라 흰색 글자로 표기된 부분은 기본적으로 플래시 발광 금지로 설정되어 있다.
이 6가지 모드 외 촬영 모드 쪽으로 눈을 돌리면 AUTO 모드가 눈에 들어온다. AUTO 모드는 존 포커스 모드 설정과는 상관없이 별개로 1m부터 무한대까지 팬 포커스로 커버한다. 1m라는 거리만 유의해주면 대부분 초점이 맞는다고 보면 된다. 단, 플래시도 AUTO로 설정되기 때문에 플래시를 쓰면 안되는 상황에서는 꼭 흰색 P 모드로 설정으로 바꿔주고 존 포커스 모드로 거리를 설정해줘야 한다.
여기서 팁 하나를 준다면 펜탁스 17의 기본 구성품인 핸드 스트랩을 이용하면 매크로 모드 촬영이 한결 쉬워진다. 매크로 모드의 초점 거리를 눈대중으로 맞추기는 어렵기 때문에 핸드 스트랩을 쭉 뻗어서 닿는 거리가 매크로의 촬영 거리인 셈이니 근접 촬영에서 두려워 하지 말자. 우리에겐 72장의 넉넉한 컷수가 있으니.
AS가 가능하다.
필름 카메라를 오랫동안 써온 유저라면 공식 AS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다. 기존 필름 카메라는 전문샵에서 구매해도 고장 나면 샵에 따라서 AS를 받기도,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막막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남은 수리 채널이 사설 AS 뿐이라 고장 종류에 따라 수리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공식 AS만한 게 없다.
이렇게 펜탁스 17을 쭉 써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각을 가진 카메라가 필름으로 나왔구나 생각했다. 누군가는 토이 카메라스럽다고 하지만 그만큼 가볍고 사용하기가 편하다는 말이다. 고급 기능들을 담고 있진 않지만 누구나 편하게 새로운 카메라를 쓰면서 인스타그램을 활용하는 카메라다.
펜탁스 17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포맷, 필름 한 롤로 오래 찍는 카메라 같은 매력도 있지만, 매일 들고 다니면서 누구나 편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카메라다. 고민할 것도 없다. 그냥 한 손으로 찍어도 된다. 이런 필름의 즐거움을 일상에서 느끼라는 펜탁스의 큰 그림. 앞으로 꾸준히 오래볼 카메라다.
펜탁스 17과 함께한 여러 순간들
웅장한 건축물 / PENTAX 17 + KODAK ProImage 100
천천히 다가가니 사진에 흔쾌히 응해줬다 / PENTAX 17 + KODAK 400
청량한 어느 여름 날 / PENTAX 17 + KODAK Colorplus 200
PENTAX 17 + KODAK 400
버려진 놀이터 / PENTAX 17 + KODAK 200
시대의 흔적이 잘 보존된 대전 근현대사전시관 / PENTAX 17 + KODAK ProImage 100
저조도에서도 잘 나온다. 약간의 아웃 포커싱까지 곁들인 / PENTAX 17 + KODAK Colorplus 200
대전 소제동. 이제는 재개발이 진행되며 영영 보지 못할 풍경 / PENTAX 17 + KODAK Pro Image 100
없어져 가는 와중에도 살아가는 우리의 흔적들. 대전 소제동 / PENTAX 17 + KODAK Pro Image 100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삽교호 놀이동산 / PENTAX 17 + KODAK ProImage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