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과 하루의 이야기
시그마 아트 사용기 (SIGMA Art Series)
세기프렌즈 4기 '헤이스' 박성혜
다만추,
'다양한 삶을 만나는 것을 추구하다'
세기프렌즈의 1차 정기미션인 '다만추'를 주제로 한 본 포스팅에서는 작은 블로그에 드문드문 글을 올리는 나 자신과 스스로의 사진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차피 남들 하는 이야기 비슷하게 할 거라서 읽기 싫으면 사진만 보고 넘어가도 상관없다. 노골적인 자기소개는 피차 낯간지러운 일이다. 책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유치원에 가지 않아서 친구도 적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 천일야화를 좋아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사막에서의 모험은 신비로웠다.
처음 읽었던 천일야화는 다섯 개 정도의 모험이야기가 수록된 아동문고 버전이었다. 나는 천 하루 동안 세헤라자데가 들려주었을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보고 싶었다.
Sigma Art 20mm F1.4 DG HSM, F7.1 1/200 iso125
천일야화는 생각보다 재미있고 복잡하다. 설화이기 때문에 바닥이라고 부를 만한 시작점도 없고, 수많은 번역가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번역해왔기 때문에 흥미만 잃지 않는다면 영원히 덕질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였던 버턴의 판본 전권을 마지막으로 천일야화를 접었는데, 관련 문헌이나 예술작품은 지금도 종종 찾아본다. 힘들 때마다 가끔씩 떠오르기 때문이다.
천일야화, 千一夜話
"One Thousand and One Nights"
| 1000일이 아닌 1001일인 이유에 관하여
Sigma Art 20mm F1.4 DG HSM, F6.8 0 iso200
천일야화의 제목은 千日이 아닌 千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1001이라는 숫자는 '끝없는', '무한한', '영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연수 1001은 생각보다 인기가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숫자로 인식되어 국정농단 사태 때 최모씨가 본인 전화번호 뒷자리로 사용, 거주지의 호실로 고집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수사를 받던 검찰청 조사실 역시 1001호였다.
서점에 가면 제목에 1001이 들어가는 책이 몹시 많다. 고등학생 때 한 번쯤 보았을 '천일문'부터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여행지 1001곳' 같은 버킷리스트 도서 상당수는 1001이라는 숫자를
컨셉으로 밀고 있다. '~아이디어 1001가지', '~방법 1001가지', '추천 영화 1001가지'......특정 영역을 정복하려면 일단 1001개의 케이스 스터디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기 이전,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1000을 엄청나게 큰 숫자로 여긴 듯하다. '1000'은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까마득한 영역, 수치화하기 버거울 만큼 많은
재화, 혹은 완전하고 거대한 존재를 표현하기 위한 완전수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포화상태에 도달한 완전수를 넘어선 1001이 무한함과 영원을 의미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영역에서도 '초월에 가까운 성취(무한함)'를 경험할 수 있다.
(2) 일단 1000개의 케이스가 필요하다.
(3)1000은 까마득한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1001이 정말 1001번째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무시무시한 챌린지를 성공한 사람은 바로 천일야화의 화자 세헤라자데인데, 목숨을 걸고 1001일 동안 이야기를 이어간 끝에 본인 스스로를 구했을뿐더러 왕의 광기를 치유하고 사랑을 이룬다.
1001일 동안 늘어놓은 재미난 이야기에 대한 보상 치고 리워드가 강력한 편. 다만 재미가 없을 경우 다음날 죽기 때문에 위험수당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사료됨.
Sigma Art 50mm F1.4 DG HSM, F2.5 1/50 iso640
그러나 천 번의 밤을 채운 다음 날을 떠올리기도 전에,
'차라리 처음부터 이 길을 걷지 말걸 그랬어'라는 생각을 하는 날이 훨씬 많다.
Sigma Art 50mm F1.4 DG HSM, F1.4 1/160 iso320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순간도 많다.
설령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대도 이 길에 남아야 하는 뿌리칠 수 없는 이유들이 내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결국 나는 미친 왕으로부터 천 하루가 되는 날까지 살아남는 세헤라자데를 목표로 버틸 뿐이다.
| 천 번을 부딪혀도 얻을 수 없는 것들
본 포스팅에 등장하는 인용구들은 아래의 책에 등장하는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
Four Tales from Arabian Nights
···삶의 여행이 고행이라고 해서 누가 삶을 포기하겠는가? 목숨을 건 일천 번 밤을 지나고서도 여전히 백척 간두인 삶은
마침내 일천 하루의 밤을 새우고서야 그 지속을 보장받는다. 천 번이 아니라 천 번과 하루의 이야기.
이 사족 같고 잉여 같은 하루가 있기에 우리의 삶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계속될 수 있음을 저자는 말하려는 것인가?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 리처드 버턴 저, 김원중 역.
옮긴이의 말 중에서
Sigma Art 20mm F1.4 DG HSM, F1.4 1/4000 iso100
Sigma Art 20mm F1.4 DG HSM, F6.3 1/125 iso100
앞으로 찾아올 천 번의 역경을 경험하리라 각오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시에 한 가지 희망을 품을 것이다. 머나먼 과정을 무탈히 겪고 나면 멋진 엔딩이 찾아올 것이라고.
곤란하게도 그 희망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실제로 온갖 일을 겪어보면 천 번의 노고 끝에 만나는 현실은 예측과 다른 경우가 훨씬 흔하다.
그토록 가고 싶던 학교에서 진리를 배웠던가? 꿈꾸던 회사 생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공간은 아름답고 아늑한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귀여운 공상들이다.
작고 사사로운 취미인 사진생활에도 이 공식은 여지없이 적용된다.
Sigma Art 14-24mm F2.8 DG DN, F11 20.0 iso800
Sigma Art 85mm F1.4 DG HSM, F16 20.0 iso200
Sigma Art 20mm F1.4 DG HSM, F1.4 30.0 iso100 (좌) / Sigma Art 14-24mm F2.8 DG DN, F2.8 5.0 iso800 (우)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여행 겸 출사를 떠났을 때, 원하는 사진을 얻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별 사진을 허탕칠 때가 제일 슬프다.
사전조사와 준비가 부족한 나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검색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가 제한적인 경우도 있거니와 예측 불가능한 날씨, 예상과 맞지 않는 어중간한 화각, 짧은 시간 동안
사진을 최대한 많이 남겨가고 싶은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불필요한 체력 낭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나를 괴롭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Sigma Art 85mm F1.4 DG HSM, F10 20.0 iso400
준비물은 필요 이상으로 챙겨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지만 여행지에서 보부상처럼 짐을 메고 걷다 보면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더듬더듬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뷰파인더 맞은편으로 찬 바람이 불어와 각막이 바싹 말라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 때는 무슨 대단한 사진을 찍겠다고 이리 애쓰는가 싶다.
집에 돌아와 결과물을 열어보면 항상 아쉬움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다음엔 더 열심히 해야지, 다음엔 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필요 없을 것 같은 것들도 다 챙겨가야지, 진짜로 다음엔 더 잘 해야지.
나를 병들게 하는 것은 나의 기대감, 또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나의 기대감.
삶의 여행이 고행이라고 해서 누가 삶을 포기하겠는가? 희망과 좌절이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동안 나의 세상은 이리저리 흘러 천 일을 채워나간다.
Sigma Art 20mm F1.4 DG HSM, F14 1/125 iso100
...알지도 못하는 곳을 아무 의도 없이 지나가다가 얻어걸린 사진. 기쁨과 배신감이 중첩되는 순간.
계속 굴리기만 했다가는 사진을 영영 포기할까 봐 가끔씩 하늘에서 랜덤으로 컷을 던져주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 죽음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세헤라자데
셰에라자드는 샤리아르 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일천 밤 하고도 하룻밤 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우리의 삶도 이야기가 이어지는 순간까지만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로 저기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삶은 죽음조차 궁금해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아라비안 나이트"의 저자는 일찍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샤갈의 아라비안나이트』 리처드 버턴 저, 김원중 역.
옮긴이의 말 중에서
타임랩스 합본 : 재생버튼 누르기 귀찮은 사람을 위해
타임랩스만큼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기는 촬영은 드문 것 같다.
우울할 때나 사진이 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 때는 극적인 사진을 찍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피사체 혹은 배경이 아름다울수록 나의 형편없는 사진을 숨기기 좋고,
마치 실력인 듯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럼프가 오거나 자존감이 낮아졌을 때는 타임랩스의 드라마틱한 효과 뒤에 숨기로 했다.
비겁한 이유로 시작한 타임랩스였는데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Sigma Art 14-24mm F2.8 DG DN, F16 1/250 iso100
동탄호수공원 타임랩스
Sigma Art 14-24mm F2.8 DG DN, F8 1/250 iso100
궁남지 타임랩스
사진을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덤벼든 덕분에 엄청나게 여러 번 실패했다. 움직이다가 삼각대를 쳐서, 배터리가 없어서, AF로 찍어서, 혹은 초점을 잘못 맞춰서, 일출을 A모드로 촬영해서,
노이즈리덕션(NR)을 끄지 않은 채로 장노출 타임랩스를 찍어서, 화이트밸런스를 자동으로 맞춰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모기가 많아서, 늦게 와서 해가 지는 바람에,
늦게 와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김, 도중에 비가 내려서, 바람이 너무 강해서, 큰 구름이 해를 덮은 채로 움직이질 않아서, 회전이동시킨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후보정이 미숙해서, 한 장의 이미지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많은 이유들이 매번 진을 치고 몰려와 사진을 다 망쳐놓고 왁자지껄 웃으며 사라졌다.
오동도 일몰 타임랩스
Sigma Art 20mm F1.4 DG HSM, F1.4 13.0 iso320
울산바위 은하수 타임랩스
실패가 딱히 싫지만은 않았다. 올바르게 장성한 사회구성원의 역할을 하는 것은 타임랩스를 찍는 동안 잊어도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과물은 실패작. 우스꽝스러운 좌충우돌의 상황이
모험처럼 느껴졌다. 재미있었다. 인터벌 촬영이 지속되는 동안 강풍에 흔들리는 삼각대를 붙잡고 불평하는 것도, 잡초와 모래가 뒤섞인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별을 보는 시간도 정말 재미있다.
광각렌즈를 좋아하게 된 지금의 취향도 별 사진과 타임랩스 덕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사진으로 기록한 시간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적어놓은 것을 보니 마치 타임랩스를 엄청나게 많이 연습해서 이젠 잘 찍는 것처럼 읽히는데, 그런 뜻은 아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사진을 시작했던 내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어주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내 삶이 천 하룻밤에 걸친 이야기라면
Sigma Art 85mm F1.4 DG HSM, F1.6 1/640 iso100
지금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계절마다 바뀌는 꽃이나, 해달별의 움직임. 사람이나 동물이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미묘한 표정들.
다른 주제도 많을 텐데 특히 자연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일상에서 느끼는 피로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역시 두렵기 때문에 언제나 발을 현실에 반쯤 걸쳐놓은 듯한 풍경을 찍고 있다.
Sigma Art 50mm F1.4 DG HSM, F1.7 1/80 iso100
Sigma Art 14-24mm F2.8 DG DN, F2.8 1/160 iso800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사진을 통해 나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고,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지혜를 얻기를 소망한다. 엉망진창인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며 살아낸 천 번의 결말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순간 부디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더 살아내길,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세헤라자데는 천 하루가 아닌 죽는 날까지
밤마다 이야기를 이어나갈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는 힘들 때마다 세헤라자데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거나, 샤갈이 그린 아라비안 나이트의 삽화를 보곤 한다.
천 일하고도 하루가 지나고서야 맞이하는 무한한 영원은 어찌 보면 첫날밤 이미 나의 곁에 찾아왔을 테니까.
Sigma Art 50mm F1.4 DG HSM, F16.0 1/40 iso1250
Sigma Art 20mm F1.4 DG HSM, F1.6 20.0 iso100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
SAEKI FRIENDS 4기
박성혜 (헤이스) I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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