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GHLIGHT
-고심을 한 깔끔한 메뉴들
-좋은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길었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여름의 한복판에서는 지긋지긋한 더위라며 어서 시원한 가을이 오길 바란다고 바득거렸건만, 막상 코끝에 찬바람이 맺히자 아쉽습니다. 이젠 누구도 들어갈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마당에 펼쳐 둔 간이 수영장 물을 아직도 유리창처럼 맑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를 닮은 진한 갈색의 긴 바지를 하나 사 왔습니다. 반바지를 벗고 처음 입은 날, 수영장에 정수기를 틀고, 소독약을 풀다가 소독약이 녹은 물방울 몇 방울이 떨어졌는데 순식간에 염색이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착하던 여름을 놓아주지 못한 벌이죠.
해야 할 일들은 밀렸는데, 가을을 인정했더니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집니다. 외출을 했다가 한적한 낯선 마을에서 잠시 시간이 남았습니다. 신중히 커피 한 잔 마실 곳을 고릅니다. 가장 신중한 포인트는 날 좋은 가을 오후, 덩치 큰 남자 혼자 여성향의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져 커피를 홀짝거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른 곳은 카페 ‘작은 방’. 막상 앞에 도착했더니 낡은 건물의 2층입니다. 암만 봐도 카페가 있을 것 같은 외관은 아닌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대문에 ‘커피, 2F’라고 아무렇지 않게 글자가 붙어 있습니다. 제 첫 직장은 미로처럼 얽힌 을지로 인쇄 골목 한복판, 작은 건물 3층에 있던 작은 잡지사였습니다. 아래 2층에는 ‘솔다방’이라는 아무도 가지 않는 낡은 다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솔다방도 지금 이 카페보다는 입구가 화려할 것 같습니다(현재의 그 골목과 건물은 핫한 젊은이들이 오가는 곳이 되었습니다만).